- 게시일
- 2020.08.15
[기고칼럼]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확실한 사료 (구보이 노리오 소장)
| 이 글은 구보이 노리오 일본 아시아민중역사센터 소장이 독도에 대한 일본의 억지 주장과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특별 기고다. ‘독도 영유 문제는 한일 기본 조약에서 이미 결론 났다’는 내용의 지난 3월 첫 기고에 이어 이번에는 올해 초 도쿄에 확대·재개관한 영토주권전시관,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반일종족주의’ 논리, 일본 방위백서 등에 담긴 독도 영유권 관련 일본의 허위 주장에 대해 역사적 자료에 근거해서 반박한다. |
구보이 노리오 아시아민중역사센터 소장
독도 영유권에 관해 일본정부는 독도가 한국령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허위주장을 해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영훈을 비롯한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은 아베 정권의 주장을 옹호하며 ‘독도가 한국 고유의 영토라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를 기만하는 것이다.
‘독도는 조선땅’임을 재확인한 안용복 사건
1693년 안용복 사건은 독도가 조선땅임을 증명할 때 언급되는 주요 사건이다. 당시 일본 막부는 당시 안용복이 머물렀던 돗토리 번(鳥取藩)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 모두 번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상신을 받고 울릉도∙독도를 조선령이라 인정했다. 이어 도해(渡海)금지령을 내리고 이를 조선에 통보했다. 즉, 울릉도, 독도 이 두 섬이 국제법적으로 조선땅임이 재확인된 것이다.
독도가 조선령임을 밝힌 또 다른 사건이 있다. ‘송도(松島·당시 독도의 일본 명칭)로 건너가는 것도 다른 나라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은 중죄’라며 처벌된 ‘덴포 죽도일건(당시 조선에서는 울릉도 영토를 둘러싼 분쟁이라는 뜻으로 울릉도쟁계(鬱陵島 爭界)라고 표현했다.)'이 그것이다. 1836년(일본 연호로 덴포 7년) 발생한 이 사건은 하마다 번 상인 이마즈야 하치에몬(八右衛門)이 일본 막부의 도해금지령을 어기고 울릉도를 거점으로 밀무역을 하다가 적발돼 처형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일본 전국에 방문(榜文)이 내걸렸고 도해금지령을 어긴 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 경고와 함께 울릉도 접근도 금지됐다.
일본정부가 독도를 조선의 땅이라 명시한 사료인 ‘태정관지령’(太政官指令, 1877)도 주목해야 한다. ‘태정관지령’이란 독도, 울릉도를 시마네현 지도에 포함시킬 지의 여부를 묻는 시마네현의 질의에 대해 당시 최고 기관인 태정관이 ‘독도와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고 일본과는 관계없는 지역’이라는 결론을 내려 내무성에 하달한 공문이다. 즉, 태정관지령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정부가 스스로 공식 명시한 공문서이다.
이보다 앞선 1년 전 1875년 일본 육군참모국이 만든 ‘조선전도’에는 울릉도, 독도가 조선땅으로 표기돼 있다. 서양과 조선의 지도까지 참고해 정확성을 기했다는 평가를 받는 공식 지도이다. 뿐만 아니라 1877년에 일본 육군참모국이 만든 일본정부 공식지도인 ‘대일본전도’, 1979년에 만든 ‘아세아동부여지도’에는 독도가 일본영토 외의 지역으로 인식되어 표기조차 되어 있지 않다. 또 1881년 일본 정부가 만든 ‘대일본전도’와 1883년에 나온 개정판에도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 영토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러일전쟁(1904-1905)으로 일본이 독도를 강탈하기 이전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명시한 공식 지도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울러 1900년 고종이 대한제국칙령 제41조를 통해 울릉도와 죽도(울릉도 부속섬 중 하나), 독도를 울릉군으로 격상시켜 한국의 영토임을 확실히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1881년 일본인이 울릉도를 침범한다는 내용이 1881년 조선 조정에 보고되자 고종은 이규원을 울릉도 감찰사로 파견하고 일본인의 침범을 감시할 것과 울릉도와 인근 두개의 섬을 상세히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고종은 이미 독도의 존재를 확신하고 특명을 내린 것이다. 울릉도에서 돌아온 이규원은 ‘울릉도외도’를 만들어 울릉도 부속 섬인 죽도와 관음도를 시찰한 내용 등을 보고했다. 이규원의 답사 이후 고종은 1900년 대한제국칙령 제41조를 통해 독도를 비롯한 울릉도 부속섬과 울릉도에 대한 실효 지배에 나섰다.
독도는 한국영토이며 주인 없는 무주지(無主地)가 아니었다. 따라서 국제법에 근거한 ‘무주지선점론(아무도 살지 않고 어떤 국가도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섬을 먼저 선점한 자가 주인이라는 논리)’은 성립되지 않으며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무효이다. 메이지 정부가 일단 한국령이라 결정내린 사항을 나중에 일본령으로 변경한 것은 일사부재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며 메이지 헌법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불법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은 독도 영유권을 되찾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작성 과정에서 한국은 당초 초안대로 ‘독도의 한국 영유를 명시한다’는 뜻을 미국 정부에 전했다. 미국은 러스크 국무차관의 서한을 보내 이를 거부했다. 러스크 서한에는 “독도,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이 바윗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 이후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 관할하에 놓여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는 러일전쟁 당시 독도를 전략적 요충지로 이용하기 위해 ‘무주지선점론’을 근거로 강탈한 행위를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이후 미국은 독도 영유권에 대해 태도를 바꾸고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제1차부터 제4차 초안까지는 ‘일본에서 제외되는 지역’을 ‘a. 울릉도, 독도, 제주도’로 명기해 독도를 한국령으로 분류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차례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한 조서를 연합국 사령부, 미국 국무부에 제출했다. 다케시마를 옛날부터 영유했다는 증거로 나가쿠보 세키스이의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도 첨부했다. 이후 조약 초안의 ‘일본에서 제외되는 지역’에서 ‘다케시마’가 삭제됐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에는 독도, 다케시마에 대한 언급은 일체 나오지 않고 양국 어느 나라의 영토인지 명기되지 않았다.
올 7월 발간한 일본 방위백서와 앞서 1월 도쿄에 재개관한 ‘영토·주권 전시관’ 등을 통해서도 여전히 일본정부는 ‘한국이 다케시마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틀린 주장이다. 일본은 1965년 6월 체결된 한일조약, 한일어업협정에서 한국의 독도 영유를 용인하고 자국의 영유권 주장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특정비밀보호법’을 통해 사료를 은폐해도 진실은 가려지지 않는다.
구보이 노리오(久保井規夫) 역사학 명예 박사는 일본 오사카 공립학교와 모모야마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현재 ‘다케시마의 날을 다시 생각하는 모임’과 ‘영토교육연구회’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7년에는 '독도의 진실' 한국어판을 출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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