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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일, 문화의 힘으로 함께 한다

    한•중•일, 문화의 힘으로 함께 한다

    ▲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중앙), 딩웨이 중국 문화부 부부장(왼쪽)과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문부과학성 대신이 28일 제주도에서 열린 ;제8회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에서 3국간 문화교류협력 합의사항을 담은 '2016 제주선언문'을 서명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한국, 중국, 일본이 3국간 문화적 교류확산을 위해 뜻을 모았다.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딩웨이(丁伟) 중국 문화부 부부장과 마쓰노 히로카즈 (松野博一)일본 문부과학성 대신이 27, 28일 양일간 제주도에서 열린 ;제8회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에 참석해 3국간 문화교류협력 합의사항을 담은 '2016 제주선언문'을 서명했다.제주선언문은 한;중;일 문화 발전을 위한 비전의 구현과 이행 강화, 동아시아 네트워크 협력 체계 구체화, 한;중;일 공동의 문화가치 발굴과 인적교류 확대, 한;중;일 문화올림픽 구현을 통한 상생 발전 추구, 문화유산 교류협력의 지속 추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선언은 문화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며, 오랜 기간 구축해온 한;중;일 간 문화교류 확대와 연대강화를 위해 보다 적극적인 노력과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 했다.따라서 3국이 유치하는 국제행사 및 올림픽 등 스포츠경기에서 보다 긴밀한 협력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한;중;일 공동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아시아를 넘어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동아시아적 가치 창출에 노력하자는 것에 의견을 같이 했다.이와 함께 청년 문화예술 전문인력 양성의 필요성에 주목하고 3국 청년 간 문화예술 및 ;한;중;일 학생 애니메이션 공동제작 사업;과 같은 문화콘텐츠산업분야의 교류증진과 교육훈련 기회 제공을 통해 청년 고용 창출에 기여하기로 했다.▲ ;제8회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에 참석한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딩웨이 중국 문화부 부부장과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문부과학성 대신.본회의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이 연달아 2018년 평창, 2020년 도쿄, 2022년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을 계기로, ;한;중;일 문화올림픽;에 대한 계획이 논의됐다. 사업은 올림픽 개최 도시에 한;중;일 예술가의 공동창작 전시, 문화사절단 파견, 동아시아 주제 학술 심포지엄 등 문화융합 프로그램을 공동 기획 하게 된다. 구체적인 사항은 내년 도쿄에서 열리는 제9회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에서 협의될 예정이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오른쪽 세 번째), 딩웨이 중국 문화부 부부장(왼쪽 두 번째)과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문부과학성대신(오른쪽)이 ;제8회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에서 ;2017년 동아시아 문화도시; 선포식을 마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와 일본 교토(京都)시, 중국 창사(長沙)시가 문화도시로 선정됐다.아울러 대구광역시와 일본 교토(京都)시, 중국 창사(長沙)시가 ;2017년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정됐다. 3국은 2014년부터 매년 각국의 한 개의 도시를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포해 한중일 도시 간 문화교류와 인적교류를 확대하고 있다.김종덕 장관은 ;;2016 제주선언;이라는 새로운 실행계획을 바탕으로 한중일 3국의 문화교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고자 한다;며 ;이번 회의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문화의 힘으로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문화부 대표들이 함께 고민하는 자리가 마련됐다;고 말했다.이하나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hlee10@korea.kr▲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중앙), 딩웨이 중국 문화부 부부장(왼쪽)과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문부과학성 대신이 손을 맞잡고 3국의 문화 발전을 기원하고 있다.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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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곤에서 번영, 그리고 공존으로 (2부)

    빈곤에서 번영, 그리고 공존으로 (2부)

    (1부에 이어) - 요즘으로 말하면 최상의 스펙인데 시험 공부해서 편하게 사는 삶도 있었을 텐데 굳이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머문 계기는? 직접 사회에 나와 공부한 것을 실천해보려고 하니 마땅치가 않았다. 일단 내가 있었던 학교 서클이 노동운동 쪽이라 노동조합에 가려고 하다, 그러나 한 선배를 통해 농민운동을 접하고 소개를 받아 1976년 이곳으로 오게 됐다. 당시에는 무엇을 하겠다는 어떤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온 건 아니었다.가족들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으니 다 된 것처럼 생각했다. 언제든 빨리 사법시험을 보고... 나도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고. 그런데 어쩌다 보니 선배들한테 이끌려서... 고시 공부를 하고 그럴 때가 아니더라. 가족한테 우리도 힘들지만 우리보다 힘든 사람들이 많다, 다 같이 나아져야 한다, 이렇게 설득을 했지. 다른 건 후회되는 게 없는데 돌아가신 부모님께 죄송한 게 많다.- 친환경농업의 장점은 분명 있다. 질도 좋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텐데. 많은 사람들이 다 이용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 농업과 자연환경, 인류의 삶과 자연과의 관계, 이런 차원에서 가격에 관계없이 이런 농사와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지금 기후변화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데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가격을 매기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공급하고, 물품을 대 주고 또 필요한 만큼 돈을 내는 이런 실험도 해 보려고 한다. 자급자족의 취지에서.- 선생의 자급자족 주장은 맹자의 항산(恒産), 항심(恒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맹자는 자급자족을 주장한 게 아니라 분업을 강조했다. 그 당시도 제자백가중 농가(農家)가 있다. 이들은 스스로 농사짓고 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가의 지도자 허행(許行, heohaeng)에 대해 맹자가 비판했다. 허행의 모자(冠)을 보고 직접 만들었냐고 반문했다. 곡식과 바꿔 구매한 거라고 하자 왜 자기손으로 짜지 않냐고 반문했다. 농사짓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孟子 縢文公上) 공자도 제자들을 정치하는 사람들로 가르쳤다. 제자 가운데 번지(樊遲)가 논농사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하자 자신은 잘 모른다고 했다. 밭농사에 대해서도 묻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는 소인배라고 개탄했던 일화도 있다. 우리는 농사를 해서 자급자족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두드러져 보인 거라고 생각한다.▲ 달걀 선별시설 내부. 섭씨 16도를 유지하며 중량, 신선도, 파손여부 등을 엄격히 적용하여 골라낸다.▲ 선별과정을 거쳐 상품화된 유정란.▲ 과자공장에서 달걀을 원료로 과자를 만드는 모습.▲ 유정란과 과자 등 생산된 제품들은 유기농업제품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눈비산 공동체의 농업연수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눈비산 농장에서는 1968년 설립 당시부터 농업기술교육을 실시해왔다. 교육은 1년 단위로 진행되며 농사철의 경우 한 달에 한 번, 주말 1박2일 교육이 일반적이다. 정부에서는 연수생 1인당 60~80만원 가량을 지원하는데, 지원자가 많아 심사를 거쳐 가장 절실하고 농사지을 의사가 강한 사람, 그리고 젊은 사람을 우선 선발한다.한국에 연수를 받으러 온 외국 공무원들이나 농업인들도 현장학습이나 실습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최근에는 영국출신 청년이 남미에서 한국여성을 알게 돼 그걸 계기로 이곳에 찾아오는 등 연수생들의 국적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교육생과 공동체 일원들의 식탁을 책임지기도 하는 텃밭에서 옥수수, 딸기, 고추, 가지, 상추 등의 재배 실습을 한다. 이 곳에서 교육생들은 기계나 비닐 등을 전혀 쓰지 않고 호미, 삽 등만을 이용해 농사짓는 법을 배운다. 교육과정에는 이 밖에도 집 짓기, 길쌈 견학 등이 포함돼 있다.▲ 눈비산 공동체에 체험하러 온 외국인 실습생들. 해를 거듭할수록 외국인 방문이 늘고 있다.- 귀농현상도 늘어나지만 도시와 농촌의 문화차이로 인한 갈등도 적잖다. 문화격차를 줄이는 방법이 있다면. 이곳 괴산 지역만 해도 젊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농사지으러 온 사람들도 있고 은퇴해서 온 사람들도 있고, 요즘 귀촌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마을에는 심지어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더 많기도 하고. 그 중에 여러 재능이 있는 사람들도 많다. 러시아 문학 박사, 물리학 박사 이런 분들도 있고... 문화적 소양이 있는 분들, 소위 지식인들이 공유를 한다. 괴산에서도 이런 저런 모임을 많이 하고 있다.▲ 눈비산 공동체의 실습생들. 한달에 1회씩하는 일반연수에서 상주하며 농업의 전과정을 익히는 심화단계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물질적인 풍요는 지난 개발연대와는 비교할 수 없으나 상대적 박탈감은 심하다. 젊은 세대의 좌절감은 깊어 보인다. 기성세대로서,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안타깝다. 일자리가 없는 젊은 사람들이 와서 참여할 수 있는 농사 캠프 같은 것을 만들 생각을 하고는 있다.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순 없겠지만... 사실 이미 어느 정도 하고 있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 상대적 박탈감은 신경 안 쓰는 것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삶을 자신있게 살면 그게 가장 좋은 거지. 남이 어떻게 사는지 비교할 것 없다. 옛날에야 일 못하면 굶어죽고 그랬지만 지금이야 웬만해선 굶어 죽진 않으니까... 헬조선이니 박탈감이니 이런 건 자기 마음가짐이 달라져야 한다. 남들하고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 자연 속에서 이렇게 사는 건 돈도 안 들고 이용하는 것 아닌가. 모든 걸 돈으로 평가해서 다 할 건 없다.대담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정리 장여정 코리아넷 기자사진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 가나안농군학교 제공whan23@korea.kr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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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요리 조리법 시리즈: 증편

    한국요리 조리법 시리즈: 증편

    증편은 빵처럼 속에 크고 작은 기포 자국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쌀가루와 술로 만든 반죽을 둥글게 만들어 대추, 밤 등을 얹고 쪄낸 떡이다.증편은 흔히 ;술떡;이라 부르기도 한다. 양반가에서는 증편(蒸片)이나 증병(蒸餠) 등으로도 불렸다. 술을 넣고 발효시켜 빨리 상하지 않으며 여름철에 주로 만들어 먹었다. 은은한 주향(酒香)과 새콤한 맛, 그리고 부드러운 감촉이 특징이다.현존하는 조선시대 최초의 한글조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1670);을 포함해 조선 중기 이후의 조리서에는 ;시루떡이나 인절미가 여름에 상하기 쉽고 맛도 텁텁해서 그 대신 증편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술떡;으로도 불리는 증편은 쌀가루에 막걸리와 효모 등을 넣고 발효시켜 만드는 떡이다. 다른 떡에 비해 쉽게 상하지 않아 여름에 즐겨 먹어왔다.** 재료 및 분량멥쌀가루 250g(2;컵), 소금 3g(;큰술)막걸리 50g미지근한 물(40℃) 100g(;컵), 생이스트 5g, 설탕 40g(;컵)고명 : 대추 8g(2개), 석이버섯 1g, 잣 1.7g(;작은술), 호박씨 1g증편색 : 치자물 1.5g : 치자 2g, 물 7.5g(;큰술)딸기가루물 2g : 딸깃가루 3g, 물 7.5g(;큰술)찌는 물 2㎏(10컵)식용유 13g(1큰술)▲ 증편의 주 재료인 멥쌀가루, 막걸리, 효모(생이스트), 설탕, 치자, 딸기가루, 대추, 잣, 석이버섯.** 재료준비1. 멥쌀가루에 소금을 넣고, 고운 체에 2회 정도 내린다. 멥쌀가루에 막걸리와 미지근한 물 ; 효모(생이스트) ; 설탕을 넣고, 나무주걱으로 고루 저은 다음, 그릇에 담아 랩으로 덮어 전기장판이나 아랫목 위에 올리고, 두툼한 보를 덮어 온도가 40~45℃ 유지되도록 하여 2시간 정도 발효시킨다.2. 반죽이 부풀어 오르면 고루 저어 공기를 빼고 1시간 정도 2차 발효를 시킨다.3. 대추는 면보로 닦아 살만 돌려 깎은 후 꽃모양을 만들고, 석이버섯은 물에 1시간 정도 불려, 비벼 씻어서 가운데 돌기를 떼어내고 물기를 닦아 폭 0.1cm 정도로 채 썬다.4. 잣은 고깔을 떼고 면보로 닦아, 길이로 반을 잘라 비늘잣을 만들고, 호박씨는 면보로 닦는다.5. 치자는 반으로 잘라서 물에 넣고 30분 정도 우려서 치자물을 만들고, 딸기가루는 물에 넣고 섞어 딸기가루물을 만든다.▲ 멥쌀가루와 소금, 막걸리, 물, 효모(생이스트)를 섞어 반죽을 만들고 발효시킨다. 반죽이 부풀어 오르면 고루 저어 공기를 빼고 2차 발효를 시킨다.** 만드는 방법1. 발효된 반죽을 3등분하여, 흰색은 그대로 쓰고 나머지 반죽은 치자물과 딸기가루물을 각각 넣어 고루 섞는다.2. 증편틀에 식용유를 바르고 반죽을 틀의 ⅔정도로 담아서 대추와 석이채 ; 잣 ; 호박씨를 올려 장식한다(18개).3. 찜기에 물을 붓고 강한 불에 9분 정도 올려, 김이 오르면 불을 끄고 증편틀을 넣어, 10분 정도 3차 발효를 시킨다(물의 온도 83℃).4. 반죽이 부풀어 오르면 강한 불에서 20분 정도 찐 후, 약한 불로 10분 정도 뜸을 들인다.5. 증편은 2분 정도 식힌 후 틀에서 꺼낸다.▲ 치자와 딸기가루에 물을 섞어 치자물과 딸기가루물을 만든다. 발효된 반죽을 3등분한 뒤 흰색을 제외한 두 개의 반죽에 각각 치자물과 딸기가루물을 넣어 색을 입힌다.▲ 증편 틀에 식용유를 바르고 반죽을 틀의 2/3 정도로 담아서 대추와 석이채ㆍ잣ㆍ호박씨를 올려 장식한 뒤 찜기에 넣는다.진행 윤소정 코리아넷 기자사진 한국전통음식연구소자료 아름다운 한국음식 100선arete@korea.kr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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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탐사기술로 300억원 금광 찾다

    새 탐사기술로 300억원 금광 찾다

    ▲ 한 연구원이 전라남도 해남 모이산 광구 인근에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개발한 ;광대역 유도분극탐사; 기술을 시험해보고 있다.최근 전라남도 진도군 앞바다에 있는 가사도 남부에서 약 300억 원 규모의 금광이 발견됐다.지하에 교류 전류를 흘려 보내 땅속 300m까지 금, 은, 구리 등 광석의 분포와 매장량을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광대역 유도분극탐사(Spectral Induced Polarization)' 기술 덕분이다.기존에 사용됐던 기술은 지하에 한 방향으로 흐르는 고출력 전류로 땅속 분극현상을 유도하고 이를 측정해 지하구조를 파악했다. 하지만 탐사기법의 특성상 현장에서 고출력 전류를 보내기 어렵고 잡음에 취약해, 한국처럼 전자기 잡음이 강한 지역에서는 양질의 자료를 획득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이번에 개발된 '광대역 유도분극탐사' 기술은 초당 여러 번 방향을 바꾸는 교류 전류를 땅속으로 보내 더 넓은 주파수 대역에 대한 정보를 측정하며 지하구조를 파악해 이런 단점을 보완한다. 전자기 잡음이 해결되는 동시에 양질의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자체 개발한 ;광대역 유도분극탐사;기술로 전라남도 진도군 앞바다에 있는 가사도 남부에서 금광석 약 21만톤이 묻혀 있는 지역(왼쪽 사진 빨간 네모 안)을 확인했다.지난 11일 전라남도 해남군 모이산 광구에서 이 기술을 시험하고 상용화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연구진은 지질 구조상 금광이 존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의 가사도로 향했다. 탐사 결과, 가사도 남부 지하 10~60m 깊이에 거대한 금광맥이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가사도에서 확보할 수 있는 금광석(금이 들어있는 광석)은 약 21만1,238톤 (금 627.5kg)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가로 따지면 300억원이 넘는 규모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연구진이 전라남도 해남 모이산 광구 인근에서 ;광대역 유도분극탐사; 기술의 현장 적용성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기술을 개발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김규한 원장은 "이번 자원탐사 신기술 개발은 국가 연구개발 사업의 큰 성과"라며 "산업에 필수적인 금속광물 탐사에 널리 활용되는 있는 기술을 한 단계 진보시킨 것"이라고 말했다.이하나 코리아넷 기자사진 한국지질자원연구원hlee10@korea.kr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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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곤에서 번영, 그리고 공존으로 (1부)

    빈곤에서 번영, 그리고 공존으로 (1부)

    ▲ 눈비산 공동체의 총괄기획자 조희부 선생.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그리고 정보화사회로의 전환 등 한국사회의 압축성장은 작은 공동체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고 말한다.1945년 식민지 압제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은 전쟁이란 미증유의 시련까지 맞이했다. 조금 남아 있던 산업시설은 파괴되고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특히 농촌의 고통은 심각했다. 가뭄, 홍수로 인한 만성 기근에 시달렸으며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공급은 절대부족이었다. 그런데다 농촌의 젊은층은 일자리가 없이 일용직 노동을 하거나 도시빈민으로 살아가야 했다.먹고 살아야겠다는 본능, 나아가 잘 살아보겠다는 한국인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해방이후 체험하게된 미국으로 상징되는 서구의 풍요로움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단체이며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내륙지역 충청북도. 그곳에서도 가장 오지인 괴산군 소수면 눈비산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1968년 미국 메리놀 선교회에서 파견한 신부들이 괴산가축조합과 시범목장을 조성했다. 1974년 한우 육우, 현물 대부, 송아지 계약 생산 등 농민지원사업을 벌이고, 농민교육원을 건립해 축산기술과 협동조합 교육을 했다. 유기농업과 유정란 생산을 시작했다. 마을 뒷산인 눈비산(雪雨山, 높이 546m) 아래 펼쳐진 25만평에는 임야와 초지, 밭, 양계장, 과자공장, 버섯재배장 등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닭 사육장은 빼곡한 공간에서 공장직으로 닭을 생산하는 일반적인 양계장과 확연히 다르다. 널찍한 공간에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주어 늘 쾌적하다. 바닥엔 볏짚을 깔아 배설물과 함께 자연 발효가 되니까 냄새가 안 난다. 넓은 공간에서 암탉과 수탉이 조화를 이루어 지내며 낳은 유정란이 대부분. 날로 먹어도 비린내가 안 나고 고소한 맛이 나며, 노른자 색깔이 선명하고 탄력이 좋다. 1만여 마리의 산란계가 하루 8천~9천개의 달걀을 낳는다. 생산된 달걀은 친환경 유기농식품 매장으로 전량 팔려 나간다. 댤걀을 원료로 만든 과자 또한 만드는 족족 판매된다. 또한 이곳에서 농사를 배우려는 지원자들은 넘쳐나 엄격히 심사를 해야할 지경이다. 생활에는 활력과 의욕이 넘쳐난다. 이렇듯 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의 농촌은 빈곤과 저개발에서 풍요와 고효율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조희부(曺喜夫, 66) 선생은 눈비산공동체의 초창기에서 오늘날까지 현장에서 땀을 흘려왔다. 소위 부산지역의 명문고 경남고등학교, 한국 권력의 핵심들을 배출해온 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젊은날 이런저런 인생의 편력끝에 농촌을 선택했다. 올해는 20대에 뛰어든지 만 40년이 되는 해다. 그를 만나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연상케 하는 농촌의 변화과정, 미래의 모습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작은 농촌마을의 오늘날은 과거 우리 사회가 겪은 빈곤, 잘 살기 위한 노력, 성취와 성장통이란 축소판을 담고 있기도 하다.▲ 눈비산 공동체의 닭사육시설. 눈비산(맨 뒤에 있는 산) 아래 25만 평의 임야에 자리잡았다.- 지난 4월 원불교 100주년 세미나에서 생명의 대전환이란 주제로 패널로 나섰다. 21세기에 어떤 전환을 맞이했다는 건가? 우선 여기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이, 기후변화가 심각해서 모든 생명체가 생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만 봐도 엄청나게 덥고 비는 안 오고, 장마도 거의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고... 이건 농사뿐만 아니라 생명계 전체가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큰 변화가 없으면 안 된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다가는 인류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위기를 맞는다는 것은 이미 1970년 로마클럽 보고서에도 이미 나온 얘기 아니겠나. 이론, 담론 차원을 넘어 크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되는 데까지는 해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지난 1989년 "인류가 자유, 평등, 진보의 깃발 아래 피와 땀을 흘리면서 이룩해온 오늘날의 문명 세계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준 반면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고 나아가서 인류의 생존 기반이 되는 지구의 생태적 질서를 훼손시키고 파괴하고 있다;.;고 한살림선언이 이뤄졌다. 얻은 것과 앞으로의 현안들은? 1986년 한살림이 시작됐으니, 올해가 한살림 설립 30주년이다. 농민들 수는 계속 줄고 농민들 힘만으로는 우리나라 농업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으로 도시 소비자들과 연대해야겠다, 이것이 한살림의 시작이었다. 도시 분들에게는 또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공급하는 거고.그래서 일본의 사례들을 조사하기도 하고, 이곳 괴산 지역의 농산물도 한살림에 보급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실패한 야마기시 양계 농법을 이곳에서 시도하기도 하고... 그렇게 한살림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그 동안의 성과라면 국내에서 안전한 농산물, 농약이나 비료를 덜 쓰는 농산물을 많이 생산하고 보급을 확대한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일반 국민이 농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한살림의 도시 조직은 협동조합이기 때문에, 한국에 소비자협동조합을 개척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다만 참여조합에 실질적인 조합원의 참여도가 낮다. 조합원은 스스로 참여도 하고 돈도 대고 의사 결정도 해야 하지만, 대부분은 보통 구매자에 머물러 있어 이런 부분을 개선해야 할 것 같다. 경제가 어려워 한살림에도 영향이 조금 있고...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단계에 와 있다.▲ 조희부 선생은 눈비산 공동체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농촌의 빈곤, 미국 선교회의 지원, 동서양의 공동체영농방식, 잘살려는 노력 등 수많은 여건들이 얽히고 설키며 대응을 하며 살아왔다고 털어놓았다.- 눈비산 공동체는 어떻게 시작됐나? 눈비산 공동체는 미국 매리놀 선교회의 클라이드 데이비스 신부의 주도로 이뤄졌다. 가난하고 굶주린 농민들을 본 데이비스 신부는 '육우'를 도입하기로 했다. 일단 소를 키우면 청년들이 배우도록 해야 하는데 체계적, 조직적으로 그 과정이 이뤄지려면 마을에 협동조합을 만들고 소나 자금은 협동조합에서 지원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신용협동조합은 저리로 영농자금을 빌려줘 당시 고리대에 시달렸던 농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당시 우리나라 소는 전부 '역우(役牛)', 즉 농사짓는 소라 잡아 먹는단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얼룩덜룩한 미국 소를 데려와서 육우로 키웠다. 한국 축산 발전에 나올텐데, 이 외국소를 또 한우와 품종 교배를 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만든 육우는 당시 서울 시청 앞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시식회도 하고 그랬다. 판매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서양의 신부들이 와서 축산업을 보급한 곳은 이곳 말고도 임실(지정환 신부), 제주도(이시돌 목장) 등이 있다. 이 곳들은 훨씬 대규모다. 데이비스 신부는 큰 목장을 만들려 했다기 보다는 농가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범적으로 소는 이렇게 키운다, 하고 보여주는 개념이었다.그 후 한일회담이 열리고 일본 자금을 받아 급격한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젊은 사람들은 공장으로 빠져나갔고 일손이 부족하니까 농기계가 들어왔고, 한우는 일소에서 고기소로 바뀌었고, 당시 소를 키우던 조직이나 지원조직은 한살림 육가공 공장이 됐고... 50년동안 압축성장이라고 엄청나게 바뀌었지.▲ 눈비산 공동체의 닭 사육시설 내부. 널널한 공간에서 땅을 밟고 암수가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양계방식은 일본의 야마기시 공동체의 영향을 받았는데 농장운영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일본 야마기시(山岸)농장은 공동체 형식으로 따지면 여러 가지 형식이 있는데, 키부츠식이라고 한다. 이건 개인 사유가 없다. 생산도 소비도 개인적인 게 전혀 없다. 몫을 나눈다는 것이 없다. 같이 나눠 쓰는 거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샤브식이라는 게 있는데 생산은 같이하고 소비는 개인적으로 한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야마기시는 키부츠식이다.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巳代藏;1901~61)선생은 양명학 계통이다. 지행합일주의다.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실천이 중요하다 이거지. 일본의 여러가지 이런 공동주의 사상, 농업도 중시하고 등등. 대단한 사상가다. 야마기시 어록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했는데, 대중화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전세계적으로 공동체, 공동으로 사는 건 수도원이나.... 농업공동체같은 건 미국 아미쉬 공동체 등이 남아있고.... 그리고 아주 원시적으로 사는 공동체 몇 군데가 남아있고... 그렇지만 거의 없어졌다. 인간이 무엇인가, 생명체란 무엇인가 이런 여러가지... 진화의 과정을 보면... 연구를 많이 해야 하고... 국가가 혁명을 통해 시도한 경우도 많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게 실패한 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잘 맞지 않으면 지속이 어렵게 되는 것 같다. 일본 내에서 야마기시 공동체도 또 잘 되지 않았고. 개인의 자유 선택을 철저히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의 공유가 아닌 모든 것을 공유한다. 처음에는 동의할지 몰라도 나가는 사람에게는 그 동안의 기여분에 대한 지급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이비 집단으로 보이는 거고.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어떻게 공유하고 협동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참 어려운 문제다.. 석가모니든 예수든 누구든, 삶이란 것에 고민을 많이 해보고, 고민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이 내놓은 생각에 귀를 기울여 가면서, 열심히 하되 거기에 집착하거나 매달리거나 빠지지 않고, 항상 한 발짝 떠나 자기 자신을 잘 살펴보고, 남 따라 세상을 살 것은 없고... 자기가 자신감을 가지면 사람들의 눈초리라든가 이런 것은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2부에 계속) 대담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정리 장여정 코리아넷 기자사진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 가나안농군학교 제공whan23@korea.kr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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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인들은 재미있는 농담을 잘하네요”

    “한국인들은 재미있는 농담을 잘하네요”

    고교 시절 만화를 읽다가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는 독일 대학생과 만났다. 독일 튀링겐 출신의 교환학생 리사 샤이딕(Lisa Scheidig, 이화여대)은 1년간의 한국 유학을 마치고 다음 달 귀국한다. 지난해 코리아넷 명예기자단에 지원, 명예기자로서 문화체험, 이벤트 참가 등 활발히 움직였던 그는 한국어 구사가 한결 유창해졌다. 외국인 특유의 억양이 거의 보이지 않고 막힘없이 말하고 다양하게 표현을 구사하는 등 오히려 원어민인 우리를 놀라게 했다. 지난 1년간의 한국생활을 되돌아봤다.▲ 코리아넷 명예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리사 샤이딕(Lisa Scheidig, 독일, 학생)가 지난 24일 1년간의 한국 유학 생활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다.교환학생으로 한 해 동안 한국에 머물렀는데 어땠는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KBS 토크쇼 "안녕하세요"를 직접 방청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있어서 좋았다. 독일에는 재미있는 예능프로그램이 별로 없어서 재미있는 한국 예능을 많이 봤다. 독일에서는 GEMA라는 기업에서 음악 저작권이 없는 온라인 영상을 자동으로 차단한다. 대부분 유투브 동영상이 그 대상인데 다른 웹사이트도 영향을 받는다. KBS World는 검열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서 자막과 함께 한국 예능 프로그램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 사귄 친구들은 그다지 많지는 않지만 문제가 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들이 꽤 있다.명예기자로 활동해보니 어떤가? 재미있었는데 바빠서 기사를 많이 못 썼다. 그 점이 아쉽다. 독일에서 쓰고 싶은 기사가 있다. 예전에 한국 사람들이 외화를 벌기 위해 독일에 왔을 때 독일에 김치재료가 없어서 독일식 김치를 만들었다. 내가 직접 만들어서 독일식 김치에 대한 소개를 하고 싶다.한국을 알게 된 계기는? 중학교 역사 수업 때 한국에 대해서 들어봤지만 선생님께서 잠깐 언급만 하시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 일본 만화 '장난스런 키스'를 보고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만화는 나중에 한국 드라마로 제작되었다.한국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전공 선택을 두고 고민할 때 친구가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조언해줬다. 한국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고 싶어서 한국학을 선택했다. 언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한국 동화도 많이 읽곤 했다.구체적으로 한국학 어떤 분야를 공부하는가? 전반적인 한국학을 전공한다. 독일에서는 정치, 역사, 사회, 문화 같은 과목들을 공부했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수강할 수 있는 과목들이 많지 않았다. 독일에서 배우지 않았던 한국 미술 같은 과목들을 수강했다.한국학을 전공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 언어 문제가 있는데 특히 한자가 어렵다. 예를 들어 '세계화'라는 단어에서처럼 '화'라는 한자어가 쓰이는 경우에 '세계'라는 단어를 알아도 '화'라는 단어 때문에 '세계화'라는 단어 전체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한국어 단어들이 많다. 사전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인 친구나 한자를 잘 아는 한국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는다.나중에 한국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가? 최종 목표는? 번역을 하거나 한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한국 생활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맞는 신발 사이즈를 찾을 수 없어서 그 점이 어려웠다. 거기다 비가 한참 올 때 가지고 있던 신발들이 많이 망가졌다.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이 마지막 신발인데 뒤꿈치 부분이 닳았다. 주거 문제도 있었는데, 이사를 다섯 번이나 했다. 은행 서비스도 가장 불편한 점 중의 하나였다. 지금 관악구에 살고 있는데, 독일 은행과 바로 호환 서비스가 되는 은행이 없어서 돈을 인출하려면 학교가 있는 서대문구까지 갔다. ATM기의 경우도 글로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적혀 있지만 안 되는 곳이 많다. 한 번에 인출할 수 있는 금액에 한도가 있는 점도 불편했다.교통도 불편했다. 외국인들이 버스를 잘 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안내방송이나 안내 스크린이 아예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버스 정류소가 아닌데도 사람들이 그냥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목적지까지 버스 정류소의 숫자를 세는 것도 소용이 없었다. 경주를 여행할 때는 버스 지도에 주요 정류소만 표시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버스는 다른 정류소에서도 섰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버스를 탈 때는 항상 구글이나 네이버 지도 검색을 했다.음식에 적응하기도 힘들었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에는 밥만 먹어야 했는데, 먹기가 힘들어서 케이크만 먹은 적도 있었다. 그러다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거나 외국인 입맛에 잘 맞는 한스델리에 가서 음식을 사먹기도 했다. 김밥도 많이 먹었는데 거의 매일 먹었다.한국에 적응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은 것 같다. 음식 때문에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있는지? 부대찌개를 가장 좋아한다. 소시지가 들어가서 좋다. 불고기, 삼겹살도 엄청 좋아한다.이제 곧 독일에 돌아가는데, 돌아가서 먹고 싶은 음식은? 소시지가 가장 먹고 싶다. 진한 치즈와 독일식 '우유밥' 도 먹고 싶다.한국에서 경험했던 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혼자 경주를 여행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서울에서는 길을 잃어버리면 매우 힘들었다. 경주에서는 길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곳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보다 더 친절했다. 외국인을 신기해하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한국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도 재미있었다. 뉴스에 나온 적도 있었고 아는 선배가 주인공으로 나온 ;이웃집 찰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도 있다. 세 시간을 촬영했는데 TV에 나온 시간은 겨우 2분이었다. 어쨌든 신기한 경험이었다.한국에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에 남는다. 해인사에서 템플 스테이를 한 적도 있는데 거기 계셨던 스님과도 친구가 되었다.독일 사람들과 다른 한국 사람들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면? 독일의 유머는 한국의 유머와 많이 다르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이 하는 농담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재미가 없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하는 농담은 독일인들에게도 재미가 있다. 한국 사람들은 재미있는 농담을 잘 하는 것 같다.한국과 독일의 문화 중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독일과 달리 위계질서를 중시한다. 독일에서는 친구나 가족들끼리는 나이와 관계없이 말을 편하게 하는데 한국에서는 내가 나이가 어리면 존댓말을 써야 한다. 어른들 앞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도 있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하게 된다. 독일에서는 한국에서처럼 '나이 차별'이 없다.한국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과 달리 의심이 많은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잘해주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한국인 남자친구가 다른 도시로 이사할 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도와줬는데 남자친구는 많이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왜 도와주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내가 도움을 받으면 그냥 고맙게 받고 다음에 내가 도와줄 수 있을 때 도와준다.한국과 독일의 수업은 어떻게 다른가? 교환학생 첫 학기에 충격을 받았던 일이 있다. 개강일에 교수님들이 지각을 하거나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런 공지 없이 2주 늦게 수업을 시작한 과목도 있다. 독일에서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다.성적 시스템도 다르다. 독일에서는 절대평가로 점수를 받는데 한국에서는 상대평가로 점수를 받는다. 여기에서 미술 수업을 들었는데 나는 미술 전공이 아니다. 노력했지만 전공 학생들이 당연히 나보다 잘 했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수강 신청을 하는 과정도 다르다. 어떤 수업에 수강생이 밀려 수강 신청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독일에서는 수강신청 스트레스 없이 수강 과목을 골라 수강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한국에서 수강 신청을 할 때는 수강과목 코드번호를 외워서 긴장하며 기다려야 한다. 지난 학기에 나도 수강신청을 하려고 두 시간 동안 앉아서 수강신청 '클릭'을 해야 했다.한국 학생들과 독일 학생들의 차이는? 많이 다른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상대평가로 평가를 받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절대평가였다면 한국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을 것 같다. 독일에서는 자유 시간에 할 수 있는 분량의 숙제만 준다. 독일에서는 밤새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아예 없다. 대학교 도서관은 밤에 운영을 하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대학교에서 파티도 많이 한다. 한국에서 숙제가 너무 많아서 자유시간이 거의 없었다.한국에서는 교수님이 어떤 책을 읽으라고 지정해주시면 바로 그 책을 읽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다. 독일에서는 지정해준 책과 비슷한 얇은 책을 읽어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독일로 돌아가면 한국의 어떤 것이 가장 그리울지? 음식이다. 부대찌개가 가장 그리울 것 같다. 베를린에 부대찌개를 파는 식당은 없지만 아시아 마트가 많아서 라면, 만두, 김치 같은 음식들은 살 수 있다.윤지혜 코리아넷 기자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wisdom117@korea.kr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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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임 시술 지원 전계층 확대

    난임 시술 지원 전계층 확대

    ▲ 정진엽 보건복지부장관이 2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저출산 보완대책을 브리핑하고 있다.다음달부터 난임 시술 의료비 지원이 전 소득 계층으로 확대된다.또,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는 남성근로자를 위한 육아휴직급여가 월 1백50만원에서 최대 2백만 원으로 올라간다.정부는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출생아 2만 명+;; 저출산 보완대책을 25일 국무총리 주재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확정했다.이번 보완대책의 핵심은 난임 부부 의료비 지원이다. 난임 시술 지원 소득 기준이 전면 폐지되고 소득 하위계층에는 지원금과 지원횟수가 상향되기 때문이다. 난임 부부는 아이를 원하지만 임신이 쉽지 않아 인공수정, 체외수정 등 고비용 의료 시술이 필요하다. 정부는 그동안 부부 합산 소득이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150%(5백83만원) 이하 계층만 난임 시술을 지원해왔으나 올 9월부터 전면 지원으로 확대된다.또, 소득 100%(2인 가구 기준 3백16만원) 이하 가구를 위한 체외수정 시술 지원 비용과 횟수도 올라 최대 9백60만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현재까지는 1회당 1백90만원이었던 지원금이 앞으로 2백40만원으로, 횟수는 3회에서 4회로 늘어나기 때문이다.정진엽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번 대책은 난임시술 전면 지원 확대, 일ㆍ가정 양립 선순환 체계 정착, 둘째부터 시작되는 다자녀 우대 등 자녀 수에 따라 차별화된 출산 지원책을 모색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 차원에서) 첫째 자녀 갖기 지원을 강화하겠다;며 이 보완 대책으로 ;난임 시술 지원 대상이 현재 5만 명에서 9만6천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아울러, 여성 근로자가 맘 놓고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도 강화된다. 정부는 임신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의 여성 근로자가 임금을 종전과 같이 받으며 근로시간을 하루 2시간 줄여 일할 수 있는 임신기 근로기간 단축제도 등 고용상의 배려를 정착시키기 위해 사업장 모니터링 강화를 추진한다.남성 근로자를 위한 육아휴직급여도 확대된다. 내년 7월부터 둘째 자녀를 낳고 남성근로자가 육아휴직을 하면 3달간 최대 월 2백만 원의 휴직 급여를 받을 수 있다. 이는 기존의 1백50만원에서 50만원 오른 것이다. 그 밖에, 3자녀 이상 가구의 국공립 어린이집 우선 입소를 확대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국민임대주택(면적50m;)도 우선적으로 배정해주기로 했다.윤소정 코리아넷 기자사진 보건복지부arete@korea.kr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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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캄보디아•영국 유학생, 한국서 꿈을 이루다

    캄보디아•영국 유학생, 한국서 꿈을 이루다

    한국과의 인연으로 한국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교육자의 꿈을 이룬 두 명의 유학생이 있다.;캄보디아 여성 1호 수학박사;;다음 세대가 선진국처럼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소니 찬(40) 씨는 8년 만에 서강대 수학과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수학분야에서 캄보디아 첫 여성 박사 학위 소지자가 됐다.▲ 지난 18일 서강대 졸업식에서 박사모를 쓰고 캄보디아에서 온 부모와 함께 사진촬영을 가진 소니 찬씨(가운데).그녀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 약 300km 떨어진 바탐방이라는 시골마을에서 자랐다. 오렌지, 바나나, 사탕수수 농사를 하는 아버지와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 사이에 다섯 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가게 일을 도우며 하루 수입, 물건 재고를 계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왕립 프놈펜대 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교 수학 교사로 7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모교에 수학과 석사과정이 생긴다는 소식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한국과의 인연은 왕립 프놈펜대의 애슐리 에번스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다. 에번스 교수는 공부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던 그녀를 서강대 석;박사과정 전액 장학생으로 추천한 것.2009년 유학길에 오른 그녀에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가장 큰 시련이었다. 찬씨는 ;지난 8년간 고국에 딱 네 번 다녀왔다;며 ;힘겨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지도교수님들의 격려와 채찍질에 다시 마음을 잡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서강대 장학금으로 학업을 이어온 터라 생활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악물고 독하게 견뎌온 지난 8년의 시간은 왕립 프놈펜대 수학과 교수 임용이라는 값진 선물을 안겼다. 그녀는 오는 9월부터 학생들을 가르친다.찬씨는 ;교육 사각지대에 있는 캄보디아 소수민족과 여성들을 위해 더 쉽고 재미있는 수학 교재를 만들고 싶다;며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캄보디아에서 좀 더 나은 교육을 받게 될 날이 곧 올 것이다;고 확신했다.경영학과 수석 졸업한 푸른 눈의 영국 청년;한국에서 제 이름으로 된 교육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올해 동국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영국 캔터베리 출신 잭 웹스터(30)는 당당했다. 2012년 입학해 4년간 평점 4.5점 만점에 4.4점을 받은 그는 지난 25일 가을 학위수여식에서 135명의 경영대 졸업생 명단 중 가장 윗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동국대 경영학과를 수석졸업한 영국 출신 잽 웹스터 씨.그의 한국 인연은 2009년으로 되돌아간다.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 중이었던 그는 자신처럼 여행을 오거나 현지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들과 만나면서 한국에 대해 알게 됐고, 곧 한국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그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끌어 들이는 마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2010년 1월 무작정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고 한국어학당에 등록해 한국어부터 배웠다. 타지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돈을 아끼려 고시텔을 전전하며 숙식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포기할 수 없는 뚜렷한 목표 하나가 생겼다. 한국에 정착해 영어교육 사업을 시작하는 것.;창업기술을 습득하는 겸 영국에서 하지 못한 대학 생활도 경험해 보고 싶어 입학원서를 냈다;는 웹스터 씨는 운 좋게 2012년 동국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은 그에게 큰 자극제가 됐다. 그는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정말 놀라웠다;며 ;시험을 앞두고는 밤을 새워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 모습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그는 25일 가을 학위수여식에서 성적우수상을 받고 학과에서 배운 서비스마케팅을 응용해 외국인 관점에서 발견한 영어교육의 문제점을 보완한 영어교육 사업을 준비 중이다. 골프선수 8년, 골프코치 3년 경력을 갖고 있는 웹스터씨는 ;영국에서 골프코치를 해서 가르치는 일을 사랑하고 잘할 자신도 있다;며 활짝 웃었다.손지애 코리아넷 기자사진 서강대, 동국대jiae5853@korea.kr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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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강의 기적’, 기록으로 본다

    ‘한강의 기적’, 기록으로 본다

    ▲ 국가기록원이 지난 23일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담은 동영상, 사진, 문서 등을 공개했다. 사진은 국제부흥개발은행 조사단이 1970년 한국의 철도 작업현장을 시찰하는 모습.한국전쟁(1953~55) 직후인 1955년, 한국은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자본과 자원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이런 전쟁의 파괴와 피폐를 딛고 한국은 1960년대부터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며 30년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이런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건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도움 덕분이었다.한국은 1955년 8월 26일 회원국 가입 후 두 국제금융기구로부터 30년간 약 156억 달러에 달하는 차관(借款)을 받고, 1960년대부터 주요 국책사업을 추진했다. 전천후 농업용수 개발사업(1969)을 비롯해 3차 철도 사업(1970), 영동;동해 고속도로 건설사업(1973), 충주다목적댐 건설사업(1978) 등 사업들은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한국은 1960년대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서 받은 차관을 도입해 주요 국책사업을 추진했다. 사진은 1975년 영동;동해 고속도로 건설사업 준공식 장면.하지만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1997년 외환위기가 온 것이다.한국은 IMF에 다시 한번 도움을 청했다. 정부는 경제프로그램 이행계획과 향후 3년간 210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요청했다. 경제회복을 위한 기업구조 조정, ;국민 금 모으기; 운동을 펼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은 2004년까지 갚기로 되어 있던 차입금을 3년 앞당겨 상환했고, 2001년 IMF 관리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며 또 한번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오늘날 한국은 과거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지원국이 됐다.▲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지원을 요청했고, 경제회복을 위해 국민 모두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아이를 업고 돌반지를 가져온 엄마(사진)를 비롯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에서 국민의 단결력을 확인할 수 있다.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국제금융기구의 지원과 국민의 단결로 이룩해낸 한강의 기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동영상 6편, 사진 18장, 문서 14건, 기념메달 3점 등 기록물 41건을 23일 공개했다.이번에 공개된 기록물은 경제발전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60년대 이후 작성된 IMF;IBRD 차관협정 체결 문서,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제40차 국제통화기금;국제부흥개발은행 총회;, 1997년 외환위기 사태 발생과 극복 과정 등을 담고 있다.국가기록원 기록물은 누리집(www.archives.go.kr)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이하나 코리아넷 기자사진 국가기록원hlee10@korea.kr▲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제40차 국제통화기금;국제부흥개발은행 총회.; 국제금융기구의 차관을 도입해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한국이 모범 사례가 되어 서울에서 열게 됐다. 2016.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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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외국과 환경 정책 공유 나서

    한국, 외국과 환경 정책 공유 나서

    ▲ 한국에서 환경 정책을 공부하는 외국 공무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환경부 '글로벌 환경장학 프로그램' 석사 과정생 50여 명은 22일 워크숍을 갖고 국제 환경분야 쟁점과 한국 환경정책 현황을 공유했다.한국에서 환경정책을 공부하고 있는 외국 공무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국제 환경분야 쟁점과 한국 환경정책 현황을 공유했다.'글로벌 환경장학 프로그램' 워크숍이 지난 22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열렸다. 워크숍에는 이 장학 프로그램 참가자인 17개국 50여 명의 외국 공무원들이 참석해 환경정책 관련 이슈와 한국에서의 석사 과정 이수 경험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글로벌 환경장학 프로그램'은 환경부가 지난해부터 협력국 공무원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장학 프로그램이다. 매년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선발된 외국 공무원들은 서울시립대 국제도시과학대학원과 영남대 박정희새마을대학원에서 2년간의 환경정책 역량강화 석사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제1기 과정에는 베트남, 캄보디아 등 13개국에서 25명이, 올해 제2기 과정에는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13개국 23명이 선발됐다.▲ '글로벌 환경장학 프로그램' 제1기 과정생들이 그룹토의를 하고(위) 문화체험을 하는 모습.장학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2년간 환경정책과 지속가능한 발전, 수자원 개발과 관리 등 환경정책을 비롯해 환경 세미나, 현장견학 과정 등을 필수 과목으로 이수하게 된다. 또한 각자의 직무와 관심에 따라 환경, 경제, 경영, 정책, 행정, 국제개발학 등 희망 전공을 선택할 수 있다.제1기 환경 석사학위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베트남 자연자원환경부 트란 치 둑(Tran Chi Duc) 씨는 "이번 워크숍을 통해 지난 1년간의 연수 과정을 돌아보는 동시에 다른 나라 연수생들과 국제 환경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고 말했다.장여정 코리아넷 기자사진 한국환경산업기술원icchang@korea.kr 201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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