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즌3 에피소드9에 등장하는 붉은 결혼식 장면을 알고 있는가? 영화 ;대부(1972)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직화된 살인 장면을 기억하는가? 혹은 실제 역사에서 1934년 6월과 7월 사이 발생한 나치의 숙청사건 ;장검의 밤;을 알고 있는가? 이 모든 사건을 연개소문은 642년 한꺼번에 일으킨다. 연개소문은 왕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알았다. 그는 군주를 향한 존경과 충성의 표시로 왕을 기리기 위한 연회를 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정확히 100명의 경쟁자와 정치적 숙적, 다른 장군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왕을 포함해 그 모두를 연회에서 죽였다. 우리는 연개소문이 정확히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세 아들이 세운 비에 적혀있는 날짜에 따라 추측해볼 수 있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죽은 후 국제 정치에 휘말려 꼭두각시와 노리개로 전락하고 만다. 660년대 후반은 동북아시아의 격동기였다.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장군으로 삼국유사(1200년대 초반)의 64장 ;고구려의 영탑사;에 세 번 언급된다. 삼국사기(1145년)에서 그는 20, 21, 22, 49권에 등장한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720년)와 신당서(新唐書, 1060경)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400년대 중반부터 600년대 중반까지 고구려(高句麗, BC 37~668년)는 수도인 평양에서 동북아시아를 다스리며 번영을 누렸다. 고구려는 오늘날 남한의 많은 부분과 북한의 전부, 만주의 대부분, 랴오닝성 전부, 지린성 전부, 헤이룽장성의 대부분, 몽골 동부 내륙 지방의 많은 부분, 연해주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구려의 영류왕은 618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당나라의 달력을 도입했다. 모두 고구려의 속국 지위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오늘날 이뤄지는 외교 양상과 비슷하다. 영류왕은 또한 아들을 서안의 유교 서원에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눈뜬 장님이 아니었다. 당나라가 부상하면서 고구려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10개년 ;강화 계획;을 세워 고구려의 군대와 방어력을 키운다. 특히 당과 고구려의 경계인 랴오둥 반도(辽东半岛)에서 요하(遼河)를 따라 요새들을 세웠다.▲ 백암성은 연개소문이 고구려를 다스릴 당시 천리장성 방어망의 주요 거점성이었고 당과의 전쟁에서 침략군에게 큰 타격을 준 성이다.고구려의 마지막 세 군주, 수도: 평양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년)27대.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642년) (연개소문에게 암살당함)28대. 보장왕(寶臧王, 재위: 642~668년) (연개소문이 옹립) 당나라의 첫 세 군주, 수도: 시안1대. 당 고조 이연(唐 高祖 李淵, 재위: 618~626년)2대.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 재위: 626~649년)3대. 당 고종 (唐 高宗, 재위: 649~683년)연개소문의 생존연도는 약 603~666년이다. 연개소문은 지위가 높은 군인으로 전방에 나가 있었다. 그는 요하를 따라 세워진 요새에서 당나라의 침입을 막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어느 정도 강경파로 이미 고구려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보았고 당의 간섭을 덜 받기 원했다.이는 고구려의 상류층 사이에 큰 분열을 가져와 이들 사이에 이미 싸움이 일고 있었다.642년 연개소문은 그의 계획에 착수했다. 고구려의 왕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계획을 듣고는 선제적으로 영류왕과 조신 1백명을 연회에 초대해 모두 죽여버린다. 그는 왕의 조카인 보장왕을 옹립하고 독재자로서 통치를 시작한다.입장에 따라 독자의 역사적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영류왕은 상황에 순응하는 연약한 왕이었거나 연개소문이 전쟁광에 살인자였을 수도 있다. 현실은 아마도 그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이제 고구려를 장악한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회유 정책을 펼친다. 643년 그는 불교 대신 도교를 장려한다. 당의 수도인 서안에 특사를 파견해 고구려에 도교 수도승들을 보내달라고 청한다 .하지만 645년 당의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는 고구려 궁에 파견된 당의 사절이 연개소문에게 홀대를 받은 후 몇 년 후에 발생했다. 일반적인 조공과 외교의 일부였지만 연개소문은 이에 연루되기를 거부했다. 수 년 동안 그는 고구려가 남쪽의 백제와 신라와 전쟁을 벌이는데 당이 돕거나 개입하는 것을 거절했다.당 태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645년 600년대로서 전례 없는 규모의 군대로 고구려를 침공한다. 당의 군대는 요하를 건너 고구려로 진격한다. 동일한 규모의 군대를 갖춘 배 5백척이 산둥반도(山东半岛) 옌타이(烟台)로 들어온다. 당의 군대는 고구려군을 무찌르고 오늘날의 랴오양(辽阳市)에 있었던 요동성(遼東城)을 함락해 성벽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다.하지만 당의 군대는 안시성(安市城)에서 적수를 만난다. 안시성은 오늘날 지린성(吉林省) 주타이구(九台区) 근방에 인마하(饮马河)를 따라 있는 고구려 방어선의 작은 곳이었다. 고구려의 군대는 이 곳에서 성공적으로 방어를 해내며, 연개소문이 남쪽에서 진격해올 때까지 당의 우세한 군대를 삼 개월 동안 막아낸다. 당의 해군이 동시에 평양으로 진격해왔기 때문에 연개소문은 처음에 도읍을 방어해야만 했다. 후에 역사는 당의 군대가 대동강을 타고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이때만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성공적으로 군대를 물리치고 북쪽으로 진격해 주타이구에서 적을 몰아낸다.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에서 후퇴했듯이 여름을 제외하고 태종은 당나라로 후퇴해야만 했다. 그는 비단 1백필을 안시성의 장군 양만춘(梁萬春/ 楊萬春)에게 존경의 표시로 선물로 남기고 떠난다.그 후 20년간 전쟁은 계속됐다. 신라와 당이 연합군을 형성했다. 이들은 합동으로 처음에는 백제를 그리고 660년 고구려를 함락시킨다. 661년 당의 장군 소정방(蘇定方, 592-667년)은 대동강을 타고 진격해 평양을 친다. 당의 군대는 또다시 연개소문에게 패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 이 지도는 400년대 당이 세워지기 전의 모습이다. 당과 신라 연합군은 백제를 660년, 고구려를 668년 몰락시켰다.하지만 이 모든 전투에는 대가가 따랐다. 이 무렵에 이르자 고구려의 저항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수 십 년간 계속된 전쟁에 따른 소모와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에 대한 불만 모두 고구려가 몰락하는데 원인을 제공했다. 마침내 죽음의 신이 연개소문을 치고 그는 660년경 사망한다.연개소문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들과 동생 사이에 권력 다툼이 발생한다. 이러한 고구려의 내적 분열은 고구려의 운명의 날을 앞당길 뿐이었다. 당나라와 신라 모두 연루되었고 상세한 내용은 진정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연상시킨다.요약하자면 연개소문은 호전적인 장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반복되는 당의 침입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냈다. 그의 승리는 함락된 지린성 요새를 해방시킨 것에서부터 고구려의 도읍 평양을 해군으로부터 지켜 내기까지에 이른다. 그는 국가를 구해낸 애국자이자 동시에 군주를 살해한 불충한 부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은 복잡했던 중세 동북 아시아의 국제 정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그레고리 C. 이브츠 코리아넷 기자번역 손지나 코리아넷 기자사진 위키피디아gceaves@korea.kr 201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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