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가문 '언더우드'
글·사진 = 전한 기자 hanjeon@korea.kr 일러스트 = 마누스 유진‘언더우드(Underwood)’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다.한국과 언더우드가(家)의 인연은 미국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 Horace Grant Underwood, 이하 한국명 원두우)가 1885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으며 시작됐다.그 해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에 근무를 시작한 원두우는 1889년 같은 병원 의사였던 릴리어스 호튼(1851~1921, Lilias Horton)과 결혼했다.건강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2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원두우는 병든 환자와 고아들을 돌보는 일과 함께 선교 활동에 헌신했다. 그가 돌아온 지 3년이 지난 1895년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원두우가 조선에서 선교활동외에도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에 맞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고 고종황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줬다.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원두우는 호버 베자렐 헐버트(1863~1949, Homer B. Hulbert), 올리버 R. 에비슨(1860~1956, Oliver R. Avison)과 함께 고종황제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며 지켰다. 또 언더우드는 친일세력에 의해 감금되다시피 했던 고종황제를 궁에서 탈출시켜려 했던 ‘춘생문 사건(1895)’에도 관여했다.이후 원두우가 고종황제를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7권 고종43년(1906년) 4월28일 양력 2번째 기사에는 “미국인 언더우드는 우리나라에 오랫동안 주재한 공로가 있고, 영국 의사 에비슨은 여러 번 시술한 공이 있으니, 모두 특별히 4등에 서훈하고 각각 태극장을 하사하라("美國人元杜尤(원두우) 有久駐本邦之勞, 英國醫師魚飛信(어비슨) 屢有試術之效, 竝特敍勳四等, 各賜太極章)” 명을 내린 기록이 남아있다.실록에서 어비슨의 경우 그 공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이지만 원두우의 경우 ‘오랫동안 주재’, 즉 조선에 오래 살아서 훈장을 줬다고 기록이 남은 것은 앞서 1905년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됐던 ‘을사조약’ 체결 직후라는 시대상황이 반영되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기념관에서는 언더우드 가문의 가계도와 함께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볼 수 있다.1910년 일본이 조선을 주권을 강탈한 뒤에도 선교와 교육에 힘쓴 원두우는 1915년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창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지만 이듬해 미국에서 별세했다. 하지만 원두우의 한국사랑은 끊기지 않았다.고향이자 사랑하는 조선의 망국을 아버지와 함께 지켜본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1890~1951, Horace Horton Underwood, 이하 한국명 원한경)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교육에 힘을 쏟았다.1912년 경신학교 교사를 맡았던 원한경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하 3.1운동)을 지켜보고 이를 알리는 노력을 기울였다.언더우드 가문에 대한 책 ‘한국과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서양인 가문 언더우드家 이야기’를 쓴 서정민 작가는 “원한경은 한 간행물을 통해 “3.1운동은 약소국가의 자결권을 위해 베르사유에서 세계를 재편성하는 강대국에게 영웅적이고 비폭력적으로 호소하는 독립운동이었다”라고 말하였다”고 언급함과 동시에 원한경은 “독립운동의 단순한 관조자가 아닌 한 명의 적극적 참여자로서 활동하고자 했고, 그렇게 한국의 역사에 적극 동참했다고 볼 수 있다”고 썼다.서정민 작가의 글처럼 원한경은 단순히 3.1운동을 알리는데 그치지 않았다.3.1운동 직후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만행사건인 ‘제암리 학살사건’을 외신 특파원이었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Frank William Schofield), 알버트 와일더 테일러(1875~1948, Albert Wilder Talyor), 그리고 미국 레이몬드 커티스(Raymond S. Curtice) 영사와 함께 현장을 찾아 확인하고 그 사실을 보고서를 통해 미국에 알렸다.▲ 연세대학교 교정 내에 위치한 언더우드 기념관은 1927년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가 사택으로 지은 건물로 언더우드 3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일한)가 1974년까지 거주했다.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 이후 일본의 지속적인 감시와 경계 대상이었던 원한경은 부친이 세운 연희전문대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2차세계대전이 발발 직후 일본에 의해 추방됐다.8.15 광복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원한경은 미군정청 고문, 왕립 아시아 학회 지부 회장 등으로 활약했다.원한경의 장남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917~2004, 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일한)도 조부와 부친처럼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한국의 교육과 선교에 힘썼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한국명 원한경)이 1923년 한복을 입고 찍은 가족사진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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