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일상에 뿌리내린 German Wave
“대조선국(大朝鮮國, Kingdom of Chosen) 대군주(大君主, Overlord)와 대독일국[大德國, Germany/Deutschen Reich] 대황제(大皇帝) 겸 대프러시아국[大布國] 대군주(Overlord)는 두 나라가 영원히 우애하기를 간절히 염원하여 피차 왕래하면서 오래도록 통상할 것을 의정(議定)하였다.” 위의 글은 조선시대(1392~1910)의 정부공식 기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과 독일의 첫 수교를 기록한 내용중 일부다. 올해는 한국과 독일 두 나라가 외교관계를 가진지 130년이 되는 해다. 1883년 11월 조선정부를 대표하여 의정부좌참찬(the president of the Korean foreign office) 민영목(閔泳穆, Min Yeongmok)이, 독일 정부를 대표하여 일본 요코하마 총영사(German Consul General at Yokohama, Japan) 카를 에두아르트 자페(Carl Eduard Zappe, 擦貝)가 통상수호조약(Treaty of Friendship and Commerce Between Corea and Germany /Freundschafts-und-Handels-Vertrag-Zwischen Korea und dem Deutschen Reich)을 체결했다.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Yang hwajin Foreign Missionary Cemetery)에 안장돼 있는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묘비.(사진 전한 기자) 130년간 독일문화는 한국사회에서 뿌리 내려 한국문화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음악이다. 1902년 12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악사(樂師)인 독일 사람 에케르트 〔扼巨多, Franz Eckert〕는 악보를 살펴 만들어 성의껏 교습(敎習)한 공로가 있으니 특별히 훈3등에 서훈”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는 1901년 2월 19일 시위연대 군악대의 '군악 교사'(軍樂敎師)로 초청되어 왔다. 대한제국의 위용을 상징적으로 드러낼 왕실악대와 또 중앙과 지방에 530여 명이 넘는 악대원들을 지도할 악대지도자[軍樂敎師]가 필요했기때문. 대한제국 정부는 당시 주한독일공사였던 바이페르트[瓦爾壁, Weipert] 등을 통해 에케르트를 초청했다. 그는 52점의 악기와 악보 등을 가지고 입국했으며 서양음악이 한국문화와 소통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 에케르트가 최초로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2년 7월 1일 탄생했다.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Long life)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천만세(eternity)에 기쁨과 즐거움이 날로 새롭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이렇듯 독일 음악을 비롯한 서양음악의 영향은 깊은 뿌리를 내려 오늘날 한국의 대부분 마을에는 피아노 교습소가 있다. 피아노 익히기는 대부분 유소년들의 통과의례가 된지 한세대를 훌쩍 넘었다. 필수코스가 바이엘, 체르니다. 바이엘(Beyer)은 독일의 음악가 페르디난트 바이어(Ferdinand Beyer, 1803 ~1863)가 지은 교본이다. 부르크뮐러(Johann Friedrich Franz Burgmuller, 1805~1874)의 연습곡(Op. 100 set of 25 studies)들도 빠뜨릴 수 없다. 초중고 음악교과서에는 독일 노래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독일동요 ‘Haenschen Klein’은 한국의 유소년들이 ‘나비야, 나비야’로, 크리스마스 캐럴송 ‘Der Tanenbaum’은 ‘오! 소나무’로 즐겨 불려지고 있다. 교회에서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지은 ‘내주는 강한 성(A mighty fortress is our God/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오라토리오(oratorio) ‘유다스 마카비우스(Judas Maccabaeus)’ 끝막에 나오는 대합창, ‘보아라, 정복의 영웅이 돌아온다(See, the Conquering Hero Comes/Seht! Er kömmt mit Preis gekrönt! )를 비롯, 적잖은 독일성가들이 불려지고 있다. 대중음악도 적잖게 불려졌다. ’두 개의 작은별(Zwei Kleine Sterne), 99개의 풍선(99 Luftballons)‘, ’작은 평화(Ein Bisshen Frieden)‘ 등은 오늘날에도 흔히 불려지고 있다.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의 ’봄의 노래(Spring Song)‘는 모바일폰의 컬러링 가운데 많이 이용된다. ▲19세기 독일 음악가 ‘바이엘’과 ‘부르크뮐러’가 펴낸 피아노교본은 일찍이 한국 유소년들에게 필독서로 애용되고 있다.(사진 제공- 세광음악출판사 Sekwang music) 아시아 유일의 클래식 방송 ‘KBS 클래식FM’에서는 바흐(Bach), 베토벤(Beethoven), 바그너(Wagner) 등 독일 음악가의 작품들이 거의 날마다 전파를 탄다. 많은 음악도들이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며 탄탄한 클래식 기반을 이루는데 기여하고 있다. 독일에서 활동했던 한국출신 음악가 윤이상(Isang Yun, 1917 ~ 1995)은 도교, 불교 등 아시아의 음악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켜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성악과 연광철 등도 두 나라 음악이 끊임없이 소통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괴테에서 칸트까지 독일문학은 한국에서 두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니벨룽겐의 반지(The Ring of the Nibelung/Der Ring des Nibelungen)'로 표상되는 중세기사문학에서 시작해 괴테, 실러, 헤르만 헤세, 루이제린저(Luise Rinser), 귄터 그라스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 가운데 헤세의 작품들은 한국에서 가장 번역이 많이 됐다. 헤세의 ‘데미안’,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Mitte des Lebens)’는 청소년, 젊은층의 필독서로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독일철학은 한국의 인문학에서 여전히 주요한 관심의 대상 가운데 하나다. 사진은 한국의 일간지 한겨레에 게재되고 있는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시리즈 중 ‘헤겔’편. 독일 철학은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을 탄탄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00년 가까이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전공과 상관없이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를 포함, 칸트(Immanuel Kant)·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책 한 권 정도는 독파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데칸쇼(DeKanScho)'는 대학생의 필수덕목이었다. 또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포이에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를 비롯,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 School/Frankfurter Schule) 등은 사회를 포괄적,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데 자양분으로 자리잡았다. 요즘도 한국의 일간지에는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 시리즈로 독일 철학자들이 전지면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중고교 교복에서 고속도로까지 의복에서도 독일문화의 영향은 남아 있다. 최근까지 한국 중고교 남학생들의 교복(uniform)은 검정색 바탕에 밴드칼라, 금단추 장식의 디자인이었다. 이는 19세기 프로이센(Prussia) 군대의 제복에서 차용한 복장이었다. 한국의 김치, 비빔밥 등 한국음식이 독일에 전파됐다면 독일의 소시지, 맥주, 제빵류는 한국인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됐다. 국토건설에서도 독일식 시스템은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1945년 해방이후 최대의 토목공사로 불리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다. 고속도로 구상은 지난 196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방문이 계기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박대통령은 독일의 아우토반을 직접 달리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함께 동승한 독일대통령 의전실장에게 아우토반의 계획단계, 건설, 곤리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질문을 했다고 한다. 독일 방문후 2년반 동안 연구를 마친후 1967년 5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1968년 2월1일 총연장 4백28km의 대역사(great construction)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130년을 훌쩍 넘어선 한국과 독일의 인연은 전분야를 아우르는 소통이란 결실을 이뤄냈다. 두 나라는 모든 분야에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협력하며 놀라운 발전을 이뤄냈다. 물론 두 나라의 선배들이 쌓아올린 아름다운 인연을 지속하며 더욱 단단히 다지는 것은 현재의 세대와 후배들에게 남겨진 과제다. 한국과 독일의 아름다운 첫 만남 1636년 중국의 청과의 전쟁에서 조선은 패배했다. 조선의 소현세자(1612~1645)는 청에 인질로 잡혀갔다. 1644년 세자가 청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독일 쾰른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탕약망(湯若望 Johannes Adam Schall von Bell, 1591 ~ 1666)과 교류를 가졌다. 아담 샬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자는 유럽인들이 만든 천문대를 찾았고, 서양인 과학자들의 방문을 받았다고 한다. 세자는 천문학자와 동행했고 서양역법을 수입하려고 했다고 한다. 베이징을 떠날 때 세자는 “경의의 표시로 매우 귀중한 선물과 석별의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아담샬은 세자에게 많은 서적과 지구의[輿地球] 등을 선사했다. 1644년 9월 세자는 이에 대한 답례로 아담샬에게 아래의 편지를 보냈다. “서로 다른 나라에 태어난 당신과 나, 대양으로 분리된 머나먼 나라에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의 땅에서 상봉하여 마치 핏줄이 같은 형제 모양 서로 사랑해 왔으니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이 우리들을 이끌어 주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아무리 먼 거리에 떨어져 산다 해도 그들이 지식을 애호하는데 있어서 융합할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세자는 1645년 2월 귀국했으나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애석하게도 급사(急死)했다. 다시 인연의 끈이 이어지기 20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위택환 기자 whan23@korea.kr 201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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