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일
- 2015.11.23
[심층인터뷰] 박시백 화백 : 만화로 조선시대 500년을 풀어내다 (1부)
한국엔 기록문화의 오랜 전통이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500년 기간의 왕의 통치행위와 시대상을 빼곡하게 정리한 방대한 기록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산이다. 왕의 일거수일투족, 일반 백성의 움직임, 자연현상,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당대 사람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정리했다. 임금과 신하의 생생한 대화 내용, 사건의 흐름을 상세히 담고 있어 과거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조선왕조실록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단절된 과거의 유산일 뿐이었다.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한문과 복잡한 표기양식으로 정리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한국어로 번역이 완성됐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터넷으로 무상 서비스하여 누구든지 접근할 수 있는 공공재산이 됐다. 한 나라의 기록을 온 세계에 공개한 전례없는 경우다.
온라인 공개로 인해 500년간 꽁꽁 닫혀 있는 과거의 비밀들이 낱낱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한 작가가 실록의 내용들을 만화로 풀어내는 작업을 13년간 해내 정보접근이 더욱 쉬워졌다. 그는 난해한 내용과 함께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현대어로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했다. 읽는 이에게는 즐겁고 흥미로운 일들의 연속이지만 만든 이는 고심과 복잡함으로 가득찼으리라.
그 주인공은 박시백 화백. 원래 그는 경제학도. 경제학도에서 신문의 시사만화가, 다시 역사만화가로 거듭나는 인생역정을 걸어왔다.
8시간씩 꼬박 읽어도 4년이 넘게 걸린다는, 총 2077책으로 이뤄진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면서 만화로 옮기는 데 13년이 걸렸다. 집필을 위해 읽은 책만도 100여권, 실록을 읽고 정리한 노트만도 121권에 이른다. 그는 그 노트에 바탕하여 6개월마다 한 권씩 만화를 완성했다. 그 가운데 3개월은 실록을 읽는 데 썼다. 박 화백을 만나 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에 잠시나마 동승했다.
▲ '조선왕조실록' 정사에 기반하여 500년 조선왕조 역사를 20권의 만화로 그려낸 박시백 화백. 어느 날 사극 드라마를 보다가 조선사에 관심을 가져 이 작업을 구상한 박 화백은 13년에 걸쳐 작업을 완수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500년의 타임머신에 도전한 셈이다. 무모하게도 느껴지는데 어떻게 엄두를 내게 됐는지?
500년 조선사를 그린다, 이 자체는 간단했다. 기존에 단행본도 많이 나와있었고. 어려운 것은 실록에 기초한다는 것이었지. 처음 (실록) 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한겨레 신문에서 시사 만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스트레스가 커서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가 컸다고?
내가 그리던 것은 한 컷 만화가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스트립 형태여서, 스토리도 있고 마지막 컷에 반전도 있었어야 했다. 반복되니까 새로운 관접과 접근법도 있어야 하고. 일주일에 두세 번 작업했는데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소재가 여야 대치 등으로 거의 제한돼 있다. 해마다 명절이 돌아오면 또 그것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안 다룰 수가 없고... 4년을 이렇게 하다 보니 소재 고갈도 심했다. 아니 소재가 뻔한데 접근법이 고갈된 거다. 이걸 10년을 하면 진이 다 빠져버릴 거 같았다. 그래서 아직 에너지가 있을 때 다른 일을 해야겠다 싶었다.
기존에 있는 이야기를 가공해서 풀어가는 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은 항상 있었다. 경제학원론, 헌법 등으로 교육 시사 만화를 그려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머리말에 적은 것처럼 어느 날 사극 드라마를 보다가 조선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거다. '삼국지' 등도 항상 좋아했었고, 살펴보니 조선사도 참 재밌구나 싶었고. 때마침 한겨레 신문에 조선왕조실록 번역 보급판 CD가 판매된다는 뉴스가 실렸다.
기자 본인도 그 제품 구입했었다. 49만 8천원.
가격을 정확히 기억하시다니!
조선왕조실록, 삼국사기, 고려사, 사마방목 네 가지가 한 세트였다.
그걸 직접 사 보기도 전에 바로 저거다, 했다. 조선사를 보면 책마다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해석은 그럴 수 있는데 심지어 사실도 전부 달랐다. 나중에 보니 어떤 것은 실록에 기초하고 어떤 것은 야사에 기초한 거라 그런 거였더라. 그래서 실록에 기초를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 거다.
실록을 하려고 맘을 먹고 보니 권수도 한 20권 쯤은 잡아야겠고, 실제로는 더 걸렸지만 당시 예상에 시간도 7년 정도 잡았고...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아이템이라는 생각이었다.
▲ 만화를 좋아했지만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었다는 박 화백은 한겨레 신문에 시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전업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경제학도 출신인데 만화가가 됐다. 정식으로 만화를 배운 것 같지 않은데?
지금 만화가들이 대부분 그렇다. 무작정 상경해서 선배 만화가들 밑에서 배우는 식이었지. 만화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어떤 만화를 좋아했나?
요코야마 미쓰테루(横山光輝)가 그린 '바벨2세'라는 일본 만화를 좋아했다. 내 평생 가장 감동적인 만화로 꼽는 만화다. 또 고우영 선생님, 윤승운 '요철발명왕', 신문수 '도깨비 감투' 등 워낙 기라성같은 분들이 많았으니까. 어쨌든 나이 들면 만화를 그려야지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대학도 안 가고 만화를 그린다는 건 너무 무모한 거 같았고, 그렇게까지 만화를 그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래서 독학을 한 건가?
독학이라기보다, 그냥 그렸지. 많이 그린 것도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나 많이 그렸고. 그러다가 대학 때 학생운동 당시 광주항쟁에 관한 대자보를 그렸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만화를 통해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됐다.
경제학도에서 시사만화가 그리고 전문 역사만화가, 아니 만화라는 플랫폼을 이용한 역사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인생 자체만으로도 드라마다. 시사만평과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인데.
그렇지 않다. 시사만화를 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본격 실록 이야기를 해 보자. 만화가 실록과 똑같더라. 도입부가 목조 이안사의 도망이다. 가정사를 시시콜콜히 밝힌 것을 보면 오늘날의 역사 소설보다 더 솔직한 것 같다.
미화 없이? 기생 때문에 싸운 이야기도 다 하고? (웃음)
그렇다. 기생 때문에 스무살 청년이 야반도주를 하는 거 아닌가. 심지어 혼자도 아니고 170호를 이끌고.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가 몽골로 귀화를 했었던 거니까,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계 미국인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렇게 보면 실록 초기 기록을 보면 조선이 상당히 열린 국가다. 여진족이나 왜인들을 체제에 적극 수용했고.
맞다, 조선은 왜인들을 비롯해서 귀화를 적극 장려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폐쇄국가가 된 걸까?
아무래도 후기로 가면서 오히려 외부의 변화발전의 움직임을 알았기 때문에 움츠러든 게 아닐까 싶다. 오히려 조선 전기에는 어디에서 표류해오면 재워주고, 부인도 얻어주고,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후기에는 다만 이들이 조선 밖으로 다시 나갈 수 없도록 하는 데에 신경을 쓴다.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 심리가 보인다. 하지만 전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 전기는) 요즘의 다문화 정책은 저리가라다. 세종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하자면 무슬림이 자기 복장을 입고 회어를 쓰면서 코란을 암송할 수 있는 그런 사회였는데. 성리학의 영향일 수도 있겠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본과 중국의 침략 때문에 조선사회가 폐쇄적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찌보면 사림들이 득세한 조광조 때부터 시작된 분위기라고 볼 수 있겠고, 더 나아가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그리 된 것일 수도 있다. 양대변란을 통해 성리학을 숭상했던 사림 세력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이념이 전부 허물어졌으니 교체돼야 마땅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오히려 자기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거다. 그래서 그 이후 조선의 정치체제가 폐쇄적으로 나가게 된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회는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유지됐다.
그렇기는 하다. 영조-정조 개혁시기를 사람들이 언급하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개혁은 없었다. 국가는 계속 쇠락하다가 세도정치로 가면서 완전히 몰락의 길을 걸은 거고. 그만큼 사대부 지배 체제가 공고했던 거다. 대체할 세력도 없었고, 내부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이 등장할 법도 한데 그런 세력이 나타나지 못했던 거다.
▲ 수기로 노트 정리를 해 가며 자료 조사를 했다는 박 화백. 워낙 실록의 분량이 방대해서 필기하며 정리하는 과정 없이는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고.
조선에는 27명의 왕이 있었다. 그 중에 어느 왕에게 가장 애착이 가나?
늘 받는 질문인데, 당연히 세종대왕이다. 일단 세종의 비범함은 역사 속에서 견줄 인물이 없을 정도다. 엄청난 천재인데 심지어 어마어마하게 성실하다. 사실 조선시대 왕자라는 신분은 공부하면 안 되는 입장이다. 세자라는 자리를 위협당할 수 있어서. 유교경전, 역사서 등은 전부 정치학과 관련된 거니까. 공부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구조인거다. 차라리 취미활동을 열심히 하라고 권유를 받는 상황. 그래서 실제로 취미활동도 열심히 했다. 악기 전부 다루고, 수석 수집도 하고. 그런데 이런 것들이 오히려 세종의 문화적 소양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지.
천재들이 대부분 자기주도적 성향이 강하고 독선적인 면모를 주로 보이는 편이다. 말귀도 잘못 알아듣고. 그런데 세종은 매사를 모두 다 토론을 통해 결정했다. 세종 시대에는 늘 토론이 있었고, 세종은 신하들 이야기를 다 들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토론 과정이 설득의 과정이었을 거라고 본다. 세종이 워낙 뛰어난 사람이다 보니 좋은 의견도 많았을 테니까. 하지만 토론을 통해 결정을 내리고, 또 한번 결정된 것은 끝까지 완수해냈다. 10년, 20년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를, 그것도 여러 개를 한꺼번에 진행하면서도 하나씩 다 확인하고 기어코 완수를 해 낸 대단한 추진력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지도자로써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 아닌가 싶다.
세종 때 다양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해서 문화가 융성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다 세종의 머리에서 나온 거나 다름없다. '농사직설'이니 의학관련 서적, 화폐 개혁, 과학기술 발전, 이게 다 세종이 먼저 구상하고 적합한 사람을 찾아서 추진을 시킨 거였지. 후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종을 좇고 싶어했지만 역량 부족으로 그럴 수가 없었던, 그런 빼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한다.
연민이 가장 가는 왕들은? 개인적으로는 단종, 경종, 인종이 그렇다.
일단 단종은 똑똑했고, 2~3년만 지나면 충분히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이미 문종 이전 세종 때부터 자기 야심을 거침없이 드러내던 인물이다. 수양대군도 참 기적적인 캐릭터다. 왕자라는 신분이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자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하고 대놓고 사람들을 사귀고 세력을 만들었다. 이렇게 위험한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지당하지도 않았고,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권을 쥐게 된 사람이니까.
단종이 너무 약해서 일찍 죽은 탓인 것 같다.
그럴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것은 세종의 과오라고 생각한다. 자식을 잘못 판단한 거다. 왜냐하면, 세종의 아버지 태종 같은 경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또 본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봤기 때문에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했고. 그러나 세종은 자신이 워낙 부처님 같은 인물이었던지라(웃음) 자식들도 자연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자식들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멍석을 깔아준다. 이것이 세종의 가장 큰 실수였고. 또 궁궐 안에 단종을 지켜줄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었다는 것, 이것이 연민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 또 나중에 궁궐에서 쫓겨 나가는 과정도 그렇고.
(2부에 계속)
대담 위택환 코리아넷 기자
정리 장여정 코리아넷 기자
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
whan23@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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