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일
- 2015.01.21
바리톤 김승철, 노래는 내 운명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한양(서울)으로 보내라’라는 한국 속담이 있다.
사람은 교육시키기 가장 좋은 서울에서 살아야 하고, 말은 방목하기 가장 좋은 제주의 들녘에서 길러야 최적이란 의미다. 속담이 상징하듯 한세대전만 해도 한반도 남단의 섬 제주도의 교육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제주도의 극빈 가정에서 태어난 사내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험한 산길을 두어시간 걸어야 다다를 수 있었다. 특별히 놀만한 장난감이나 놀이터가 없었다. 광활한 한라산의 기슰이 놀이터였다. 놀다가 지쳐 초원에 드러누우면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게 꿈이었다.
소년은 노래를 즐겨 불렀다. 타고난 미성은 주변을 감탄케 했다. 초등학교 학예회 시간은 그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성악가란 직업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은 학교생활조차도 쉽지 않게 했다.
제주중학교를 마치고 어려운 형편으로 제주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낮에는 중학교 사환, 서점의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다. 취업을 목표로 하는 상업학교였지만 어렴풋이 대학에 가야한다는 희망이 있었다.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치렀다. 본인이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갈만한 성적은 아니었다. 나온 성적에 맞춰 선택한 것이 사회학과였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흔히 치러야하듯 대학을 휴학하고 그는 군에 입대했다. 또래의 제주도 젊은이들은 대부분 출신지에서 군복무를 했지만 바다건너 내륙땅, 낯설고 물선 강원도 화천의 육군 27사단에 입대했다.
3년 가까운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복학을 앞둔 시기에 주위에서 음악대학에 가라는 권유가 잦았다. 재능을 썩힐 수 없다는게 이유였다. 도저히 갈 수 없는 형편이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주변의 권유는 더욱 강했다. 1985년 25세의 나이에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학과에 입학했다. 6,7년 늦은 입문이었다. 아니 십수년 늦은 출발이었다.
한국의 음악도들은 대부분 유치원입학전에 피아노, 바이올린 등 악기수업을 받고 예술계 중, 고를 거쳐 음대에 입학한다. 그는 최소 12년이 소요되는 초중고의 음악교습 과정을 생략하고 성악전공에 진입했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사범대학을 마치고 공립고등학교의 음악교사로 발령받았다. 최소한 63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자리였다. 그런 조건을 박차고 그는 경쟁의 무대에 몸을 던졌다. 1992년 32세의 늦은 나이에 성악의 본고장 이탈리아 로마로 떠났다. 배경, 연줄도 없이 도전으로 어려움에 맞섰다.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오랫동안 관광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이렇듯 산전수전의 과정을 거친후 2006년 대구 계명대학교 음악대학의 교수가 된다. 소위 말하는 일류대 출신 음악도들도 채용되기 힘든 ‘바늘구멍의 문’을 통과한 것이다. 맨몸으로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성취를 이뤄낸 주인공은 바리톤 가수로 활동하며 음악도들을 지도하는 김승철 교수다. 그를 만나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의 인생역정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았다.

▲ 유년시절 성악가가 되리라 상상조차 못했지만 음악을 계기로 운명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바리톤 김승철 교수.
선생을 만나기 전에 ‘세월’이란 노래를 들었다. 가사 내용이 선생님의 지나온 인생을 말해주는 느낌이다.
(꿈이 있니 물어보면은 나는 그만 하늘을 본다
구름 하나 떠돌아가고 세상 가득 바람만 불어
돌아보면 아득한 먼 길 꿈을 꾸던 어린 날들이
연줄따라 흔들려 오면 내 눈가엔 눈물이 고여
아 아 나는 연을 날렸지 저 하늘 높이 꿈을 키웠지
이 세상 가득 이 세상 가득 난 꿈이 있었지
사랑도 생의 의미도 꿈을 키운 생의 의미도
세월따라 흔들려 오면 내 눈가엔 눈물이 고여)
실제로 부를 때마다 내 얘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부르면 부를수록 가사에 공감한다. ‘세월’이란 곡은 이요섭 작곡가가 만든 가요인데,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멜로디만 있는 악보를 접하게 됐다. 노래가 좋아 여기에 반주를 붙였다. 사실, 이 곡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내가 가장 먼저 부른 의미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악보를 보고 싶다는 요청도 많았다. 한국에 귀국한 이후에도 가곡의 밤 행사 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젠 거의 나의 대표곡처럼 여겨지고 있다.
‘저 하늘 높이 꿈을 키웠다’ 등 가사가 와 닿는다. 어린 시절 꿈은 무엇이었나?
어린 시절엔 노래에 대한 꿈을 전혀 품어본 적이 없다. 가난했던 당시, 음악공부를 하게 될 거란 상상은 해본 적이 없다. 한라산 중턱에서 뛰어 놀았고, 풀밭에 누워 자주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 위를 나는 제트기를 보면서 공군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런저런 가정형편으로 도저히 실현될 수 없었다. 현실적인 형편에 맞춰 제주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다니면서 중학교의 사환을 하다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서점에 있으면 공부하고 독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 했다. 부두에 가서 책을 받아오고, 포장하고 서점을 청소하면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81년 학력고사 성적에 맞춰 국립 제주대 사회학과에 진학했고, 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제대 이후부터 삶이 달라졌다. 제주 성안교회에서 만난 조영래 목사님과 피아노 반주자가 내 목소리를 들고 음악 공부를 해 볼 것을 권유했다. 큰 생각 없이 제안에 응했고, 그 때가 이미 학력고사가 60일 남은 때였다.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공부에 몰두했다. 제대하자마자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다보니 면역력이 크게 약해졌고 급성 간염을 앓아 약 20일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 고생하며 4남 1녀를 키우시는 상황이라, 입원비가 큰 문제였다. 그 때, 운명처럼 나타난 분이 같은 교회 출신의 아마추어 성악가이자 신경정신과 전문의 유순형 박사다. 당시 유박사는 클래식에 관한 자료, 음반들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유 박사는 치료뿐만 아니라, 이후 음악 레슨도 해주시면서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 분이다. 그 분과 함께 하며 많은 분야에 눈을 뜨게 됐다.


▲ 바리톤 김승철 교수가 25세의 늦은 나이에 음악입문, 이탈리아 유학 생활 등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생역정을 말하고 있다.
실기시험 때는 서양가곡의 가사를 모두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받아 적어 외웠고, 우여곡절 끝에 1985년 제주대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서 4명을 선발하는 성악 전공에 합격했다. 그러나 입학 이후가 더 문제였다. 전문적인 음악 수업이 진행되는데, 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성악의 기본인 시창, 청음은 물론 피아노조차 연주할 줄을 몰랐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1년을 휴학하기로 결정했다. 휴학 기간 동안 기본기를 익힌 후 다시 공부를 시작해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던 시기, 성남, 안양, 부천합창단 합동공연의 오디션을 통과해 솔로 베이스를 맡게 됐다. 제주대 출신인 내가 큰 비중의 역할을 맡게 되어 모두 놀랐다. 공연을 약 한 달 정도 남겨두고,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전곡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음악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행복한 고민이 시작됐다. 합창단 단원도 좋았고 선생님도 좋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음악교사가 되기로 결정했다.
교회에서 만났던 지금의 아내와 그 때도 만나고 있었는데, 아내는 입시 전부터 나에게 늘 해외에 유학 보내준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었다. 발령을 받아 전곡에 있을 때였다. 당시엔 해외 자료를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많지 않았는데 아내는 어디선가 자료를 잔뜩 구해와 이탈리아어를 먼저 공부하고 있었다. 결국 2년 만에 교편을 놓고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이탈리아에서의 생활도 상당히 빠듯하고 힘들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이었다. 아내는 도착 직후 바로 한식을 판매하는 서울식당에 취직했다. 하루 종일 설거지를 하면서 구정물이 튄 옷을 입어, 배에 염증이 생길만큼 환경이 열악했다. 그저 서로만을 의지하며 생활했다. 그러던 중에 첫 아이를 가지게 됐다. 몸이 허약한 탓인지 임신부터 출산 전까지 입덧이 심해 크게 고생했다. 그렇게 고생을 시킨 첫 딸은 지금 나를 쏙 빼닮아 중앙대 연극영화과 4학년생이다. 뮤지컬에 관심을 두며 준비하고 있다.
예술계의 인맥풀이 협소하고 텃세도 심했을 것이다. 세계 유수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도 많은 상황에서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다고 늘 감사드린다. 현실적인 면에서 생각해보면 이탈리아 로마는 학력과 출신배경, 콩쿠르 입상 경력을 묻지 않고 내가 뭘 잘하는지, 그동안 뭘 해봤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내가 갖춘 만큼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이었다.
처음엔 이탈리아에 5년만 머물 예정이었지만 유학 기간이 길어지면서 한국인 관광객을 안내하는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이동시간 도중 틈틈이 짬을 내어 공부를 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오페라 스코어를 암기하는 ‘주경야독’의 연속이었다. 유학기간중 코렌차 국립음악원, 로마 아람 아카데미아 등을 차례로 마쳤다.
1997년말 IMF 외환위기사태가 발생하면서 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대안으로 콩쿠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콩쿠르에서 20개의 상을 받았다. 아마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연주자에 비해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은 전자밥통에 쌀과 고기를 들고 다니며 그야말로 ‘콩쿠르투어’를 다닐 정도였다.
그 이후로 여러 매니지먼트사의 연락을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거나, 지인에게서 받은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그 때, 오페라계의 거장인 주세페 타데이(Giuseppe Taddei, 1916∼2010) 선생님 밑에서 배우게 됐다. 내가 어려운 걸 알았던 선생님은 공짜로 레슨을 해줬다. 한국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때부터 베로나야외극장 등에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됐다.

▲ 김승철 교수는 의기소침해 있는 제자들이 자신을 통해 희망을 발견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활동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2001년 국립오페라단에서 초연했던 베르디 서거 100주년 기념 공연에서 주인공 시몬 보카네그라(Simon Boccanegra) 역을 맡았다. 세명이 번갈아 가며 주인공을 맡게 돼 있었다. 개막 공연을 맡은 첫 배우가 1막이 끝난 후 갑자기 목의 상태가 좋지 않아 무대에서 하차했다. 객석에서 보고 있던 내가 곧바로 무대로 투입됐다. 짧은 시간에 옷을 갈아있고 분장을 급히 해서 무대에 올랐다. 먼저 주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굵고 무게감 있는 나의 목소리가 청중들에게 받아들여진 것같다. 유학생활부터 시작해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이 난 그저 기적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2001년 베로나 공연을 계기로 성악가 비자를 받게 됐는데, 그 비자는 계약서에 명시된 기간만큼만 체류할 수 있었다. 기껏해야 한 작품 당 두 달 정도의 체류기간을 허용한다. 그 때부터 치열한 삶이 시작됐다. 한 작품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또 다른 작품을 찾는 생활을 약 2년 동안 이어갔다. 덕분에 활동을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이 번거로워 2004년 귀국했다.
2004년 한국에 돌아와서 나부코, 라보엠, 일 트로바토레 등 좋은 작품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한양대에서 1년 간 초빙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대구 계명대학교 교수채용 공고가 나서 지원하게 됐다. 학력과 경력 면에서 뛰어난 지원자가 많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1차 서류 심사에서 합격했다. 2차 실기시험을 보러 갔는데, 20여명의 명문대출신들이 와 있었다. 나를 보고 ‘어떻게 제주대 출신이 서류에 합격했나’라며 의아해했다. 결국 내가 최종 합격이 됐고, 2006년 3월부터 교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노래를 통해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나?
무대에 서면 조명이 어둡지만 관객들의 얼굴이 다 보인다. 그들과 눈을 맞추며 대화하듯이 노래하려고 노력한다. 최대한 작곡자, 작사자의 의도를 전달하려고 한다. 성악가는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눈빛을 통해서도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관객들과 교감하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오페라의 경우, 물론 멜로디와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교감할 수 있다고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어이기 때문에 가사전달과 소통 면에서 단절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극복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심포니, 관현악곡의 특징은 가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페라를 이해하려고 한다. 말 속에 묻어나는 뉘앙스, 얼굴의 표정, 소리의 느낌에서 칭찬과 욕을 구별할 수 있듯 음악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감정을 잘 전달할 수 있는 표현 연습을 많이 하려고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1999년, 유럽무대에서 첫 데뷔를 했다. 프랑스 디종(Dijon)극장에서 출연했던 ‘나부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역할의 몰입도와 공감도 면에서는 시몬 보카네그라역이 가장 맘에 든다. 그의 캐릭터와 인간적인 고민에 크게 공감했다.

▲ 성악가는 절대 마이크를 들어서는 안된다는 믿음과 관객들과 눈을 맞춰가는 소통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바리톤 김승철 교수.
클래식시장이 위축되는 추세다. 이를 극복하고 청중들과의 소통 확대를 위해 ‘크로스오버’를 택하는 음악인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런 시도를 해 본 적은 없는지?
음악에는 경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클래식 시장이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장르가 확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클래식은 좋은 무대와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다보니 아무래도 대중화되기 힘든 장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분명 우리도 일반인에게 가까이 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크로스오버는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유행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면 다양한 장르의 융합을 통해 조화가 중요하다. 항상 마음을 열고 교감해야 한다.
그러나 원칙은 있어야 한다. 난 개인적으로 ‘성악가는 절대 마이크를 들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왔다. 마이크 없이도 이 공간의 가장 먼 곳까지 뻗어나가는 소리를 내야 한다는 믿음으로 항상 이를 연구하고 있다.
당신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 운명의 기회를 준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한라산의 중산간 지역인 제주 월평동에서 살았을 때 초등학교 등하교 길에 한라산 중턱을 4시간 이상 왕복했다. 목장의 초원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자연속에서 살았다. 쌀밥은 일년에 몇 번밖에 맛보지 못했다. 잡곡과 감자로 살아야했던 가난한 일상이었다. 어린 나에게 지금의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음악을 하기전엔 자신감이 없었다. 음악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음악으로 내 운명이 180도 바뀌었다. 음악은 나의 운명이며 삶이다.
앞으로의 꿈은?
교수와 성악가라는 두 가지 직업을 갖고 있다. 건강하게 노래를 부르고 싶다. 제자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싶다. 학생들이 의기소침해 보인다. 그들이 나를 보고 희망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글 위택환·이승아 코리아넷 기자
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
whan23@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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