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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넷뉴스

게시일
2014.12.08

아직도 전설은 계속되고 있다

1996년 독일 중부의 소도시 굼머스바흐(Gummersbach). 20대 한국청년이 나타났다. 평범한 동양인의 체형과는 달리 그는 2m3cm의 거대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큰 키에 민첩함과 파워까지 갖춘 그는 독일 핸드볼 분데스리가를 휘저었다. 전무후무한 분데스리가의 전설 윤경신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1996년 독일무대에 데뷔한 이래 굼머스바흐에서 10시즌, 함부르크에서 2시즌 등 총 12시즌을 뛰며 8차례나 득점왕에 올랐다. 2000-2001시즌에는 324점을 기록, 분데스리가 한 시즌 유일하게 300득점 이상을 달성했다. 지난 2001년에는 국제 핸드볼 연맹으로부터 올해의 핸드볼 선수(IHF Welthandballer)로 선정되었다. 그가 거둔 2,908골은 42년 역사의 분데스리가 통산 최다득점으로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윤경신 현 두산 남자핸드볼팀 감독이 경기도 의정부실내체육관에서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고 이다.

윤경신 현 두산 남자핸드볼팀 감독이 경기도 의정부실내체육관에서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고 이다.

윤경신 현 두산 남자핸드볼팀 감독이 경기도 의정부실내체육관에서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고 이다.

▲ 윤경신 현 두산 남자핸드볼팀 감독이 경기도 의정부실내체육관에서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고 이다.

그의 앞을 가로막을 상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국제무대에서도 1995년과 1997년 세계선수권대회와 2004년 아테네올림픽 득점왕에 오르는 등 명실상부 최고의 핸드볼 스타로 코트를 누볐다. 핸드볼 국가대표로 250회 이상 출전하였다. 1990년 베이징부터 2010년 광저우 대회까지 아시안게임 6번, 올림픽은 1996년 애틀랜타 대회를 제외하고 1992년 바르셀로나때부터 지난 2012런던올림까지 5차례나 출전했다.

2008년 그는 독일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30대 후반임에도 그는 타고난 체력으로 2013년 6월까지 자신이 뛴 모든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13년 9월 코리아리그에서 감독으로서 첫우승을 따냈으며 팀의 5년 연속 우승을 지켜냈다. 어느새 40대 초반에 접어든 그를 만나 핸드볼 인생을 들어봤다.

* 윤경신 감독과의 인터뷰

경신 감독(왼쪽)이 자신의 핸드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윤경신 감독(왼쪽)이 자신의 핸드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독일생활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했다. 그곳에서 계속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고 다른 나라에서도 좋은 조건으로 영입하려 했을 텐데, 그걸 마다하고 귀국한 이유는?

제의가 있었다. 당시 네 살 난 아들이 있었고 아내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해서 여기서 계속 남느냐 한국에 들어가느냐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결국에는 가족들 때문에,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오랜 외국생활로 힘든 점도 느꼈기 때문에 귀국하게 됐다.

- 농구, 배구를 하지 않고 핸드볼을 선택한 이유는?

서울 숭인초등학교 4년 시절 특별활동시간에 핸드볼을 선택하게 됐다. 공을 잡아 보니 희한했다. 농구나 축구공처럼 크지도 않고, 야구나 탁구공처럼 작지도 않은 게 참 어중간했다. 한데 그게 맘에 쏙 들었다. 그 생소하고 특이한 사이즈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고, 손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숭덕 초등학교에 핸드볼팀이 창단돼 전학하게 됐다. 그 당시에도 농구, 배구는 굉장히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던 스포츠였고, 핸드볼은 좀 생소했던 종목이라 궁금했다. 핸드볼을 한다고 했을 때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도 핸드볼 골키퍼 출신이었더라. 어머니는 힘든 핸드볼을 왜 하려고 하느냐며 처음엔 말리셨다.

- 최고 득점왕 기록은 아직도 여전한가?

2,908골 득점하며 최고 득점왕에 올랐다. 3천 골을 못 넣은 게 조금 아쉽기는 하다. 이 기록이 깨지긴 쉽진 않을 것 같다.

- 우월한 신체적 조건이 궁금하다. 집안 내력인가?

그렇다. 부모님 모두 키가 크다. 아버지는 181cm, 어머니는 170cm정도 된다. 누나도 175cm다. 동생(윤경민)도 지금은 부상 때문에 은퇴했지만 두산 핸드볼팀에서 활약했다. 집안 자체가 골격과 키가 크다. 선천적으로 몸이 건강하고 골격이 좋다 보니깐 외국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부상도 적었고 이런 우월한 신체적 조건 덕분에 해외에서도 오래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굼머스바흐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팀과 지역 주민들은 어떻게 일체감을 갖고 있나?

대학교 3학년이었던 1995년 아이슬란드 세계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그때 굼머스바흐 팀도 출전했고 관계자들도 있어서 나를 눈여겨 본 것이다. 그 당시에 그들에게도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을 영입하는 건 하나의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영입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인연이 돼서 굼머스바흐에 들어가게 됐다. 사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유럽, 특히 독일무대에서 뛰어보는 것이 내 꿈이었다. 막연한 꿈만 가지고 있었는데, 운 좋게도 기회가 왔다. 그때는 돈이고 조건이고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사인했다. 그냥 나는 무조건 간다’고 했다.

굼머스바흐는 매우 조그만 도시다. 인구가 적어 핸드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핸드볼만 봐도 유럽이 핸드볼 시스템이 활성화 돼있고, 리그도 체계적으로 구성돼 있다.

처음에 그곳에서 적응할 때는 많이 힘들었다. 언어소통이 가장 어려웠다. 독일팬들의 지지와 사랑은 엄청난 힘이 됐다. 한국인이라고 직접 담근 김치도 가져다 주기도 했다. 독일인들이 만든 김치가 한국 맛을 낼리 만무하지만 그들의 정성이 너무 감사했다. 독일팬들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보내는 애정은 두터워졌다. 한마디로 말해 그들은 의리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특히 중년, 노년부부들이 보내준 분에 넘친 사랑은 잊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이 뛰는 선수들과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려고 하면서 가까워졌다. 4년 째 되니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더라. 실수를 해도 받아주고 이해해주니깐 자신감이 생기더라. 나는 참 인복이 많은 사람 같다.

- 지금까지 가장 인상에 남는 순간은?

2007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유럽핸드볼연맹(EHF)컵에서 부동의 1위 팀을 꺾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 굼마스바흐팀 은퇴식 때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때 2만여 명의 홈팬들이 모였다. 정말 울컥했다. 조촐한 은퇴식을 생각했는데, 그렇게 많은 팬들이 와서 나를 응원해줄지 생각도 못했다. 지금까지 독일팬들과 SNS를 통해서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경기했을 때도 오신 분들도 있었고, 심지어 내 결혼식 때도 10여 명의 독일팬들이 찾아와 축하해줬다. 너무 고마운 분들이다.

- 경희대 박사논문 주제가 ‘리더십과 선수들의 자기관리, 팀 문화’다. 당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리더십이란?

어떤 리더십이 옳다고 정의 내리기 쉽지는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들과의 소통, 선수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리더십인 것 같다. 동시에 훈련을 할 때는 확실하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지도자로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계속 노력하는 중이다.

선수들 대부분 중,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강압적이고 지도자의 눈치를 보는 운동을 해왔다. 나도 그랬다. 이제는 너무 강압적인 것이 아닌 스스로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감독이 지시한 대로 그냥 따라 하는 것은 로봇에 불과하다. 지도자가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들끼리 서로 의논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 그런 자율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1,2년 안에 이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노력하고 있고 그 변화가 조금씩 보이고 있다. 이것이 내가 강조하는 소통의 리더십이다.

- 롤모델을 독일대표팀의 하이너 브란트 감독으로 삼았다고 들었다. 그분의 어떤 면이 본받을만한가?

하이너 브란트(Heiner Brandt) 감독은 초대 굼마스바흐 감독이었다. 나를 집에도 초대하기도 했고, 당시 독일어를 못했던 나는 한독사전을 갖고 대화를 나누면서 정을 쌓았다. 자상한 아저씨 같은 스타일이었다. 체육관에서는 정말 독하고, 카리스마적인 리더였다. 푸근하지만 일을 할 때는 혹독하게 가르치는 지도자였다. 그런 모습에 나는 그분을 롤모델로 삼았다. 유럽 무대는 프로이기 때문에 어떠한 실수나 건방진 태도에 굉장히 엄격하다. 자유로우면서도 정해진 규칙을 잘 지켜야 하는 곳이 유럽 무대다. 예의를 중시하는 이곳에서 밝은 인사성과 겸손한 태도는 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의 조직문화와 한국의 유교적인 전통과 예의가 잘 어울렸던 것 같다.

핸드볼은 희로애락을 함께 한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윤경신 감독

▲ 핸드볼은 희로애락을 함께 한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윤경신 감독

- 당신이 생각하는 핸드볼의 매력은?

스피드와 몸싸움이다. 핸드볼은 몸싸움을 허락하는 구기종목 중 하나다. 가장 격렬한 운동이 핸드볼이기 때문에, 스피드와 몸싸움 테크닉이 그 스포츠의 가장 큰 매력이다.

몸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독일에서 10kg이상을 찌웠다. 웨이트 훈련을 통해 몸을 키웠고 몸무게를 110kg이상 불렸다. 서로 간의 기 싸움이 많은 운동이다. 그때 서로 몸을 부딪치고 기 싸움하던 선수들이 지금은 좋은 친구가 됐다. 이 운동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요즘도 국제대회에 나가면 지도자로 활동하는 옛 동료들을 만나곤 한다. 시합이 끝난 후 그들과 맥주 한잔을 걸친다. 여러 나라에 친구들이 있다. 한국에서만 활동했다면 이런 친구들을 어떻게 만났을까.

 윤경신 감독(왼쪽)과 그가 이끄는 두산 남자핸드볼팀.

▲ 윤경신 감독(왼쪽)과 그가 이끄는 두산 남자핸드볼팀.

-당신에게 핸드볼은 어떤 의미인가?

핸드볼은 내 인생이다. 계속 직업으로 가지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게 만든 것이 핸드볼 때문이었다. 인생과 같다. 핸드볼에는 희노애락이 있다. 기쁘고 슬플 때도 있고, 이것 때문에 눈물 흘린 적도 있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 더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 운동을 그만 둘 때까지 핸드볼을 좋은 이미지로 가지고 가고 싶다.

윤경신 감독이 독일 굼마스바흐와 함부르크 팬들에게 행운을 비는 메시지.

▲ 윤경신 감독이 독일 굼마스바흐와 함부르크 팬들에게 행운을 비는 메시지.

글 위택환, 손지애 코리아넷 기자
사진 전한 코리아넷 기자
whan23@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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